리커란李可染의 수묵 산수화
1. 20세기 최고의 산수화
“전통, 서양화법, 조화造化라는 세 가지를 창조적으로 결합한 이가산수李家山水는 그 면모가 독특하고 격조가 숭고하며 그 기세가 넓고 웅대하여 현대의 어느 누구라도 미치지 못하는 경지다.” 畵壇點將錄, 評現代名家與大家, 陳傳席, 三聯書店, 北京, 2005, 138쪽
리커란(1907-1989)의 화집을 손에 잡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된다. 특히 그의 산수화가 그렇다. 젊은 시절의 그림에서는 서양화의 영향이 농후하게 엿보이기도 하고 중국 전통 문인화의 색채도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40대와 50대 초반에 그린 그림들은 이미 리커란이 대가로서의 위치에 다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적인 풍경을 주제로 한 그의 그림들은 그의 기교가 완숙한 단계에 도달하였음을 확인시켜준다. 화가로서의 기법뿐만 아니라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도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성글고 간결하면서도 우아함이 넘쳐흐르는 그의 풍경화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양화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한다. 특히 1957년, 그가 동독에 머무르면서 그려낸 그림들은 유럽의 풍경과 건물 등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서양의 유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동양화에서의 산수화 또는 풍경화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끔 만든다. 동양의 풍경을 그리면 동양화, 서양의 경물을 그려내면 서양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리커란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동양화를 특징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질료, 기법, 전통이며 동시에 무엇보다 자연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1960년을 기점으로 그가 타계하는 1989년까지의 그림들은 한마디로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산수화요, 풍경화다.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검은 빛의 먹물들, 은은하게 빛을 투영시켜 드러나는 사물의 실체들, 화면을 넘쳐나는 우주의 기氣와 힘은 전혀 예사롭지 않다. 리커란 본인의 말대로 그림들은 “기운이 넘치고, 넓고 크며, 웅장하면서도 빛이 난다. 氣勢博大雄輝 論李家山水, 李可染書畵全集, 天津人民出版社, 1991, 28” 리커란의 그림들이 수천 년 전통을 바탕으로 하되 20세기에 들어 전통을 넘어서는 새로운 장을 열었음을 각인시켜준다.
2. 전통과 현대
“글짓기의 규율은 주위를 맴돌며 변화하므로 매일 매일 그 배움을 새롭게 해야 한다. 변화하면 오래 가고 옛 것에 통하면 부족하지 않다. 시류의 변화를 따르면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이요, 그 기미를 타게 되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다만 현재 새로움을 만들려 하면 옛것을 참고로 하여 법을 정하라. 文律運周, 日新其業, 變則堪久, 通則不乏. 鄒時必果, 乘機無怯, 望今制奇, 參古定法“ - 유협
2.1 산수화 역사의 개괄
위진魏晉시대에 사영운謝靈運이 대자연의 산수를 주제로 한 시작품들을 짓기 시작한 이래로 임천林泉 또는 산수는 동양의 고유한 사상과 맞물려 동아시아 예술의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요 동시에 화제畵題가 되었다. 당나라 때 오도자吳道子(약685-758)와 왕유王維(699-759)가 수묵을 위주로 한 산수화를 그려내면서 그 이전 시대에 인물화를 중심으로 한 동양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송대에 이르러 범관范寬과 이당李唐(1066-1150), 거연巨然과 동원董源, 마원馬遠(1164-?)과 하규夏珪, 원대에 원말사대가인 황공망黃公望(1269-1355), 예찬倪瓚(1301-1374), 왕몽王蒙(1301-1385), 오진吳鎭(1280-1354)을 거쳐 명청明淸시대에 이르러 산수화는 기라성 같은 화가들에 의해 그 전성기의 꽃을 피운다.
그러나 명말 동기창董其昌(1555-1636)에 의해 주창된 남종화와 북종화의 구분은 불필요할 정도로 문인화를 중시하는 경향을 만들어 내었다. 특히 왕유를 필두로 하여 문동文同(1018-1079)이나 소식蘇軾(1036-1101) 등을 거쳐 명말의 위대한 화가 서위徐渭(1521-1593)에 이르러 대두된 사의화寫意畵는 동양화에서 산수화의 입지를 퇴색시키게 된다. 청초 왕시민王時敏(1592-1680과 그의 손자 왕원기王原祁(1614-1715) 등을 위시한 사왕四王은 산수화의 중흥을 이룩하였으나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기보다는 과거의 화법을 답습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팔대산인八大山人(1626-1705)이나 석도石濤(1642-1707) 등은 나름대로의 위대한 산수화를 그리기도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화단의 주류는 팔대산인이나 18세기 김농金農을 주축으로 한 양주팔괴揚州八怪 등이 즐겨 그린 사의화였으며 이러한 추세는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19세기 중반 해파海派로 불리는 일단의 화가들이 등장하였으니 이들은 양주팔괴에서 시작된 비학碑學을 그림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조지겸趙之謙(1829-1884)은 바로 새로운 화풍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비학이란 본디 금석학과 관련하여 서법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서법은 “단장하지 않으니 기굴奇崛하고, 수아하지 않으면서 조광粗鑛하고, 유창하지 않으면서 삽중澁重하고, 유미하지 않으면서 웅강雄强하고, 난숙하지 않으면서 생졸生拙하다” 20세기 중국회화의 거장 리커란, 완칭리 지음, 문정희 옮김, 시공사, 38쪽 “조지겸의 회화는 비학을 회화에 융합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학자이자 시인, 서법가이면서 독창적인 전각가를 겸했기 때문에 시, 서, 화 삼절이라는 문인화의 전통에 인印을 추가하여 시, 서, 화, 인을 결합시켜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 상동, 39쪽 이러한 전통은 오창석吳昌碩(1844-1927)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되고 20세기 제백석齊白石(1863-1957)은 이러한 화풍의 최고봉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화풍은 여러 가지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우선 제국의 쇠퇴와 서양 열강의 침략 그리고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서양의 새로운 문화사조 등을 포용하거나 극복할 새로운 힘이 부족하였다. 다음으로는 전통적인 사의화의 커다란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림의 대상들은 사군자, 화훼, 어조류 등에 국한되어 격동하는 시대의 현실과는 괴리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발생되고 있었으며 한국이나 일본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였다. 한국은 전통의 단절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전통회화는 밀려오는 서양화의 조류에 겨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으며 그나마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적인 색채가 강한 채색화가 대두되고 있었다. 일본은 먼저 근대화과정을 겪었지만 그들의 그림은 동양화라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색채를 띠우고 있었다. 이는 에도시대에 고도로 발달된 판화 우키요에를 근저로 하여 서양의 유화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생겨난 현상이었다.
2.2 리커란의 위치
리커란은 이러한 시대의 산물이다. 그는 20세기에 태어나 거의 한 세기를 살다 간 사람이다. 온몸으로 시대의 격랑에 맞서 시대의 정신을 표현하고 동시에 시대를 넘어서는 위대한 작품을 창출하였다. 그의 그림들은 전통이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전통을 유지하며 동시에 새로운 서양화법까지도 수용하여 동서양의 융합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러한 융합은 대부분 그림을 그리는 기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리커란의 그림이 위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기법상의 융화가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동아시아인으로서 동아시아의 정신적인 혼을 철저하게 지켜내고 또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사실에 있다. 리커란에 대한 평가가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일부 중국의 평자들은 리커란의 그림들이 당대 산수화의 최고봉인 것은 틀림없으나 과거 산수화의 최고봉들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가 시나 서에 부족함이 있고 특히 전각을 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소위 전문화가의 그림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畵壇點將錄, 陳傳席, 三聯書店, 133쪽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아직까지도 중국의 전통이 살아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들은 전통적인 평가기준에 의거하여 문인화풍의 그림들을 선호하고 또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리커란의 산수화는 현시대의 최고 수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그림들은 북종화의 태두라 할 수 있는 범관의 그림처럼 웅대하고 기가 넘친다. 리커란은 양식상으로 보아도 거연이나 동원 같이 소위 남종화라 일컬어지는 문인화풍의 부드러운 산수화나 이를 더욱 발전시킨 황공망의 그림들에 필적하거나 넘어서는 새로운 화법을 열었다. 그의 이러한 위대한 업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각고의 노력 끝에 그의 나이 60이 넘어서야 이루어낸 결실이다.
2.3 리커란의 일생
그는 청나라 말기 광서33년 1907년, 강소성 서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영순李永順이며 삼기三企라는 이름도 있다. 아버지 이회춘李會春은 가난한 농사꾼 집안이었으며 나중에 서주 시내로 나와 식당을 경영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야채가게를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이름도 없이 자랐다. 리커란은 3남5녀 중의 셋째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이른 나이에 서법과 산수화를 배웠다. 16세 때 상해미술전과학교에 입학하여 반천수潘天壽(1897-1971) 등으로부터 중국화를 배우고 서양화도 접하게 되었다. 재학 중에 강유위康有爲(1858-1927)의 강연을 듣고 중서융합中西融合 등 그의 주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29년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서호국립예술원에 입학한다. 당시 교장인 임봉면林鳳眠은 서비홍徐悲鴻(1895-1953)과 더불어 새로운 서양화법의 중심인물이었다. 이곳에서 리커란은 프랑스 화가 앙드레 클로드의 지도를 받게 된다. 25세가 되어 그동안 동거하였던 첫 여인 쑤어(蘇娥)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이 무렵부터 전통 사의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또한 중일 전쟁으로 인하여 항일선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 1939년 그의 나이 32세에 중경에서 항전미술선전 활동에 종사하고 이곳에서 목우도牧牛圖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 때 피난을 함께 하지 못한 아내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받는다. 임봉면은 물론 서비홍과도 친분을 나누게 되고 부포석傅抱石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여인인 쩌우페이주(鄒佩珠)와 재혼을 하게 된다. 1946년 서비홍의 추천을 받아 북평국립예전의 강사로 부임하고 이듬해 그의 나이 40이 되었을 때 제백석과 황빈홍(1864-1955) 두 거장을 만나 뵙고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틈틈이 수묵화 사생을 위해 여행을 하게 되고 50세 때 동독으로 4개월간 여행을 다녀온다. 1966년 이후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 ‘반동학술권위’라는 죄목으로 비판을 받으며 고생을 하고 그의 그림도 흑화黑畵라 하여 비난을 받는다. 1979년 그의 예술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그는 중국미술가협회의 부주석을 맡게 된다. 1989년 82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그는 세상을 떠난다. 리커란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기술은 “20세기 중국회화의 거장 리커란, 완칭리 지음, 문정희 옮김, 시공사”의 년표에서 발췌한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