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가부키/Kabuki _歌舞伎/가부키죠
Kabuki /가부키/ 歌舞伎/가부키죠
가부키만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 1889년에 세워졌다가 관동대지진과 뒤이은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51년에 재건되었다. 공연을 모두 관람할 수 있지만 이것이 부담스러운 경우에는 입장료 ¥1000 정도만 내고 흥미있는 막만을 골라 관람할 수 있다. 가부키에 대해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면 입구에서 가이드 이어폰을 빌리면 된다. 영어와 일본어로 안내되는 이어폰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할 수 있다.
▣ 저자 가와타케 도시오
1924년 도쿄에서 태어난 저자는 가부키의 학술적 연구체계의 기초를 마련한 가와타케 시게토시의 아들이며, 에도 가부키 작가의 거장인 가와타케 모쿠아미의 손자이기도 하다. 1948년 도쿄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비교연극학 연구에 매진했으며, 와세다대학 교수가 된 1964년부터는 후학양성에 힘썼다. 퇴임 후에는 빈 대학에 객원 교수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강연을 실시했고, 특히 가부키와 일본 전통극인 노(能)의 해외 공연의 문예고문을 맡아가며 가부키를 해외에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의 저서는 80여 권에 달하는데, 그 중 『비교 연극학』,『일본의 햄릿』,『연극 개론』,『가와다케 도시오 가부키론』 등은 학술적 명저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 역자 최경국 ▣ Short Summary 가부키는 다른 나라의 연극이 단지 앞쪽의 사각무대에서만 공연되는 것과 달리, 극장 전체를 하나의 극으로 연출시키는 극장성(Theatricality)을 지니고 있다. 동시동작 효과를 표현하기 위한 회전무대나 배우를 무대 밑에서 등장시키는 엘리베이터(세리), 또한 객석 안으로 연결된 보조무대(하나미치) 등의 기구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무대 배경과 배우의 성격을 나타내는 문신(구마도리), 여성역할을 하는 남자배우(온나가타) 등은 충분히 관객을 사로잡을 만큼 독창적이고 신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부키가 만인에게 통하는 연극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데에는 배우의 연기가 큰 역할을 했다. 가부키는 대사가 거의 없고 색과 형태와 소리를 동원해 드라마를 연출한다. 따라서 극이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배우의 탁월한 전문성이 필요하다. 서민 연극인 가부키 가 오늘날 전통양식의 확고한 계승과 더불어 현대 무대예술 창조에 기여하게 된 데에는 가부키 배우들의 ‘형(型)’의 전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기예를 모방하는 전승이 아니라 창조를 가미한 ‘형(型)’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부키가 세계 속에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모티브이다. 이 책은 가부키에 대한 낯설음만큼 신선한 흥미도 주지만, 일본의 가부키가 글로벌 예술로서 터를 잡은 것과 같이, 한국의 고전극이 세계성을 얻기 위한 참고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 차례 제1장 자유자재로운 연극 공간 제2장 양식미와 종합예술 제3장 인간 보편의 드라마 맺음말 세계 속의 가부키 가부키 제1장 자유자재로운 연극 공간 독자적인 극장기구 하나미치에서 배우의 등장은 슷폰이라는 출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미치 무대 밑에 대기 중인 배우가 극적인 순간에 슷폰을 통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미치의 등장장면이나 연기를 ‘데하(出端)’라고 하는데, 가부키 극의 성공여부가 ‘데하’의 한순간에 달려 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미국 사람들을 감동시킨 <주신구라> 공연에서는 주인공이 4막이 진행될 때에서야 하나미치에 처음 등장했다. 하나미치의 존재 가치는 무대공간을 객석 속으로 펼침으로써 극장 전체를 하나의 ‘연극 공간’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극이 진행되는 도중 극적인 순간에 주인공이 하나미치에 등장하면 객석에서는 “맛테마시타(기다렸습니다!)”하고 일제히 소리친다. 객석에서 자발적으로 환영의 추임새를 넣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연극에는 없는 가부키만의 독특한 생동감이다. 가부키 연극의 또 다른 특징은 대사를 포함한 연기가 항상 무대에서 객석을 향해 수직으로 꽂힌다는 점이다. 과거에 하나미치에는 객석 쪽으로 뛰어나온 나노리다이(名乘)이라는 받침대가 있었다. 이곳에서 배우는 자기소개나 사물의 취지와 유래 등을 음악적으로 표현했다. 후에 나노리다이는 폐지되었지만 오늘날에도 가부키 극에서는 상대배우에게 말할 대사를 객석을 향해서 말한다. 서양연극에서 셰익스피어가 이러한 수직형이지만, 서양의 주류를 이루는 리얼리즘 연극에서는 배우가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극 속의 인물로서 행동한다. 즉 연기공간이 무대 안으로 한정되어 있다. 반면에 일본의 전통연극은 음악을 포함한 연기 연출과 무대, 극장의 구조기능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전체가 하나의 극을 이룬다. 가부키는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이 공감하고 서로 접하는 Theatricality의 연극이다. 시어트리컬러티(Theatricality)는 극장 전체가 연극 공간으로 바뀌어버리는 성질, 즉 극장성이다. 이는 본래 서커스 등도 포함된 광의의 의미인데, 말하자면 대사에 의한 드라마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외견상의 아름다움이나 귀를 즐겁게 하는 음감 등, 풍부하고 다채로움으로 극장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공감의 장소가 되어버리는 -연극 본래의 성질- 것을 말한다. 하나미치의 성립 가부키의 진화와 더불어 하시가카리도 오늘날의 하나미치로 변화하게 되었다. 1629년, 오쿠니를 비롯한 여성가부키는 풍기문란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탄원 끝에 1653년, 두 개의 조건 하에 재개 허락을 받았다. 그 하나는, 미소년 배우의 전발(前髮, 결혼 전의 사내아이가 이마 위로 땋아 얹는 머리)을 자를 것, 또 하나는 호색성이 강한 춤이 아닌 ‘흉내 내기(어떤 인물로 분장하여 재현하는 일)’를 주로 한다는 조건이었다. 강제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로써 가부키는 본격연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664년부터 막이 설치되고, 무대장치 등, 극을 위한 도구의 발달이 진행되면서 하시가카리의 폭을 넓혀 본무대로 흡수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나미치가 비로소 연기장소가 된 것은 1684~1704년, 즉 17세기 말이었던 것 같다. 1687년에 그려진 <나카무라 극장의 두 배우>라는 그림을 보면 하시가카리의 위치에 반주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고, 무대높이에서 객석 쪽으로 연결된 또 하나의 통로 위에 가마와 두 배우가 그려져 있다. 즉 하나미치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해외 공연을 시작한 초기에는 하나미치 설치를 위한 필요성을 납득시키는데 무척 고생을 했다. 예를 들면 러시아 초연에서는, 객석이 줄어들면 채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극장 측이 하나미치를 설치해 놓지 않았다. 다행히도 통역이 가부키 연구가였던 덕에 겨우 납득시킬 수 있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소방법 때문에 객석을 통과하는 가설물 허가가 나오지 않아 지금도 무대에 가까운 출입구 쪽으로 하나미치를 사선으로 가설할 수밖에 없다. 회전무대의 다이너미즘 회전무대 발명의 동기는 가부키에 다막, 다장면이 많아졌기 때문에 장면 전환을 빨리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회전무대는 기능 이상의 예술적 효과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회전무대는 복수 장면 등을 영화나 텔레비전의 동시동작 수법처럼 관객의 눈앞에서 전개해 보일 수 있다. 회전무대 외에 극 연출의 묘미를 더해준 것이 ‘공중타기(추노리)’이다. <요시쓰네 벚꽃 천 그루>라는 극에서처럼 인간이 여우로 변신하는 등의 장면에 공중타기가 이용되는데, 이는 무대에서 3층석 안쪽까지 쳐놓은 와이어를 통해서 연출된다. 가부키는 이처럼 하나미치, 회전무대, 세리, 공중타기 등 다양한 극적 장치로 연극 공간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서민을 위한 환락의 장 여기서 가부키의 또 다른 맛인 음식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가베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과자와 도시락과 초밥의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지금은 스모 경기장 주변에만 겨우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가부키 공연장 근처에 찻집이 있어서 돈 많은 관객들은 이곳의 좌석을 예약해놓고 가부키 공연을 보았다. 즉 여기서 차와 술을 마시고 가베스를 먹고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본다. 그리고 긴 막간 시간을 이용하여 찻집에 다시 돌아와 정식 요리를 먹고 또 연극이 끝나면 여기서 야식을 먹고 집에 돌아갔다. 가베스의 즐거움은 가부키 극장이 의자석이 되고 나서 찻집과 함께 소멸했는데 지금도 식사휴게가 가부키 관람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는 것은 당시의 잔재일 것이다. 환락의 장이었던 가부키 극장도 메이지 시대가 되자 문명개화의 물결 속에서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72년, 메이지 신정부는 여러 가지 권고와 통달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상류의 귀족이나 외국인이 구경 오는 것을 의식하여 고상한 연극을 권장하고, 교육에 도움이 되는 사실본위의 극을 만들도록 했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관객의 동화(同化)를 너무 진행시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즉 극에 대한 동화가 너무 진행되면 관객이 배우를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1909년, 시카고의 한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명작 <오셀로 Othello>가 상영되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바트라는 명배우가 악당 이아고 역할을 하였다. 극이 진행되고 이아고가 오셀로 장군의 부인을 죽이려고 결심했을 때, 갑자기 객석에서 정의에 투철한 청년 장교가 이아고를 향해 총을 쏘았다. 곧 윌리엄 바트는 무대에 쓰러졌고 그대로 절명했다. 대혼란이 일자 제정신을 차린 청년 장교는 권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쏘아 자결하였다. 일본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사쿠라이라는 무사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를 걱정한 부모는 바깥 활동을 권유하였고 사쿠라이는 친구들과 함께 <덴지쿠 도쿠베>라는 연극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극에서는 주인공이 늙은 어머니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효자인 사쿠라이는 이 장면을 보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그리고 곧 출입구에 맡겨놓은 칼을 되찾아 “괘씸한 놈!”이라고 소리치며 무대로 뛰어갔다. 그때 그를 제지하러 뛰어나온 남자 스텝의 어깨에 칼이 내리꽂히면서 결국 즉사하였다. 도쿠베를 연기하던 배우는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사쿠라이는 죽이지 못하여 억울하다며 할복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지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 참극 이후, 시카고에서는 총을 쏜 청년과 총에 맞은 배우를 하나의 묘에 매장하여 비를 세우고 이렇게 새겼다. ‘이상적인 배우와 이상적인 관객을 위하여!’ 한편, 일본의 경우는 사쿠라이의 부모가 중재자를 통해 백 냥의 금을 내놓고 은밀히 처리하였다. 가부키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관객에게 제시하거나 사상을 고취시키는 극이 아니다. 단지 서민 누구나가 픽션의 세계에서 울고 웃으며 위안을 얻는 장인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가부키는 하나미치를 통해 배우와 관객이 교감하는, 말하자면 동화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부키는 무대가 객석과는 별도의 픽션임을 인식시키는 이화(異化)의 역할도 한다. 즉 관객이 몰입할 것 같으면 머리에 찬물을 끼얹듯이, 회전무대나 음악이나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을 불시에 연출하여 동화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제2장 양식미의 종합예술 음감미의 세계 가부키에서 샤미센(三味線)이라는 악기도 매우 중요하다. 가부키에 샤미센을 쓰지 않는 무대는 없다. 샤미센은 네 개의 판자를 합친 통에다 긴 지판을 달고, 그 위에 비단실로 꼰 세 줄의 현을 단 것이다. 샤미센은 본래 일본 악기가 아니라 외래품을 개량한 것이다. 원래는 이집트가 원산지인데, 1558 ~1570년경 오사카 항구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몸체에 양의 가죽을 붙였으나 이것이 서아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뱀가죽을 덮게 되었고, 일본 본토로 들어오자 큰 뱀이 없었기 때문에 고양이 가죽을 붙이게 되었다. 그때까지 현악기의 주류였던 비파보다 휴대가 용인한데다 경묘하고 섬세한 음색을 내므로 도쿠가와 시대의 서민들이 많이 애용했다. 가부키 음악은 ‘게자 음악’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무대 왼쪽의 구로미스(반주음악을 하는 곳)의 위치를 게자(下座, 아랫자리)라고 표현했기 때문인 것 같다. 구로미스음악(반주음악)의 종류는 2천 6백여 곡 정도 되며, 그것은 관현 타악기에 의해 연주된다. 말하자면 대소고적(크고 작은 피리와 북)을 중심으로 호궁, 쟁, 퉁소, 징, 조종, 꽹과리부터 목어, 시계, 오르골(자명금) 등 다종다양한 악기로 구성된다. 그중 샤미센과 함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큰북이다. 큰북의 쓰임새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시각을 알리거나, 전투시작, 씨름 개장 등을 알린다. 한편, 비, 바람, 번개, 파도소리 등 자연현상에 관한 효과음이나 분위기 조성의 의음(擬音)적 효과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오로지 큰북만을 쳐서 표현하는데 극 전개와 함께 듣고 있노라면 정말 그 소리처럼 들린다. 가부키는 효과음이나 배경음악뿐만 아니라 대사 자체도 음악적이다. 아무리 사실미가 강한 내용이라도 일상의 회화로 진행되지 않는다. 대사는 시를 읊는 것처럼 전달되는데, 그 음감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방식이 ‘칠오조’이다. 칠오조는 과거의 하이쿠(5·7·5·7음을 정형으로 하는 시)나 오늘날의 엔카(일본의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일본시의 기본형이다. 따라서 가부키 속의 칠오조는 하이쿠와 함께 일본 리듬의 전통을 서민문화 속에 꽃피웠다고 할 수 있다. 시각미의 세계 가부키의 색채 중에서도 붉은색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꽤 재미있다. 원래 붉은 색은 원시적인 색으로, 결코 고급스럽다고는 할 수 없다. 유치하고 야만적이며, 피를 연상시키고 악마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붉은 색은 가부키 미(美)의 본질적인 요소이기도 한 성적 매력에 깊이 관여한다. 가부키의 이른바 아카히메(赤姬)는 가부키에서 여자 혹은 귀인역의 총칭인데, 이들은 대개 붉은 색 옷을 입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또한 허리띠나 기모노 안으로 보이는 하의 또는 속옷 등이 붉은 색인걸 보면 그것이 관능미를 표현하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엿볼 수 있다. 가부키의 시각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은 구마도리(힘을 강조하기 위해 얼굴에 선을 그리는 화장)이다. 이는 특수한 배역에 한정되어 있는데도 매우 특이하고 강렬해서 책표지나 포스터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등, 가부키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구마’란 음영(陰影)을 말한다. 하얗게 칠한 얼굴에 골격을 따라 색을 넣어 선을 그리고, 한쪽을 엷게 칠하여 근육과 그림자를 나타낸다. 그 색이나 선의 수, 굵기, 형태 등에 따라 배역의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구마도리를 하는 배역은 초인적인 힘을 가진 호걸이나 이에 대항하는 악당들이다. 중국의 경극에도 구마도리와 비슷한 검보(瞼譜)라는 화장법이 있으며,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각지에도 다채로운 화장법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구마도리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다른 나라의 분장에서는 얼굴을 여러 가지 색으로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 빈틈없이 칠한다. 적어도 인간의 표정을 없애고 인간 이외의 대상을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일본의 구마도리는 진한 곳과 흐린 곳의 농담(濃淡)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을 강조하려 한다. 여기에 시현(示顯)이라는 양식적 자연주의 이념이 작용하고 있는데, 뉴욕타임즈에 실린 평을 보면 서양연극이 재현(representation)인 것에 비해 가부키는 시현(示顯, presentation) 연극이라 했다. 여기서의 시현은 현실의 나타냄이 아니라, 그 본질을 제시하고 표현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 언뜻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으로 보이는 ‘구마도리’가 실제로는 성격묘사의 리얼리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구마도리와 연관되어 형성된 가부키의 특징은 ‘미에(見得, 정지 동작)’이다. 미에는 신체를 조각처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하는 연기 수법으로, 배우가 동작 중간 중간에 포즈를 취하고 몇 초 동안 정지하는 연기방식이다. 중국의 경극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동작인데, 중국의 ‘미에’는 갑자기 정지하고 다시 갑자기 움직이는 불연속적이고 직선적인 동작인 반면, 가부키는 부드러운 선을 그려가며 몸을 움직이다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했을 때 딱 정지하는 곡선적이고 부드러운 멋을 풍긴다. 미에는 인물 사이에서 심리적 긴장이 있을 때도 연출되는데, 중간막이 끝날 때 중요 인물 여럿이 미에를 하게 되면 긴장의 상황에 대한 복선을 의미한다. 서양극과 일본 극의 차이는 해외 공연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과거의 극에서는 시간을 묘사할 때, 대사를 통해 관객의 머릿속에 밤을 재현시켰다. 하지만 조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가부키는 이런 식으로 상황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암흑 속에서 칼싸움하는 장면을 연출할 때도 가부키는 더듬거리는 몸짓으로 칼을 집는다거나 밤을 연상시키는 대사를 통해 상황을 시현한다. 서양에서 공연을 할 때면 현지 극장 관계자들은 하나미치의 설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연출 방식을 좀처럼 납득하지 못하고 당황스러워 한다. 배우ㆍ역할ㆍ온나가타 가부키의 배우는 남자만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 여자 역할을 하는 남자배우를 온나가타(女方)라 칭한다. 온나가타는 하나미치의 존재와 함께 가부키 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 가부키는 여자배우가 주체가 되는 예능이었다. 여기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즉 도쿠가와에 의해 바쿠후가 수립되고 정치 중심이 에도로 옮겨지면서 갑자기 진공지대가 된 교토의 해방 무드가 관능적인 여성예능인의 진출을 허용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종의 자유로운 허탈 상태 속에서 스트립쇼가 탄생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관능미를 구가했던 여자 가부키는 유학자들의 빈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매춘이라는 폐단도 생겨났고, 유녀들에 의한 동종의 예능단도 잇달아 생겨났는데, 그 모습이 유곽의 하리미세(長見世, 유녀들이 늘어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되었다. 또한 그 폐해는 무사계급에까지 미쳤다. 높은 신분의 사무라이가 신분을 숨기며 가부키 극장에 드나들었고, 성주가 외국인 접대용으로 가부키 배우들을 사유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다다나오가 가부키의 여자배우를 고액으로 사들인 일이 발각되었다. 이후 곧 풍기문란을 이유로 가부키가 금지되었으나 근본 이유는 바쿠후(군사정부)의 위신이 실추되고, 마침내는 봉건체제에 금이 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여자 가부키가 26년간의 역사로 모습을 감추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바로 ‘와카슈(미소년) 가부키’이다. 일본 예능은 예로부터 남자가 담당하였고, 이미 미소년 예능도 있었다. 다만 여자 가부키가 없어짐으로써 미남자 가부키가 융성해졌을 뿐이었다. 고전 가부키를 통해 여자의 매력을 알아버린 관객들은 더욱 여성의 요염함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미소년들은 예쁘게 머리를 묶고 화장을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아름다움과 요염함을 겨루게 되었다. 이에 관객들은 군침을 흘리고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는 등, 그 색정 폐해는 무사와 승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와카슈 가부키도 전면 금지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653년, 와카슈가 배제되고 온나가타가 포함된 새로운 가부키가 재개된다. 이때부터 가부키는 예술본위의 본격 연극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예(藝)의 창조와 전승도 마침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예(藝)ㆍ형(型)ㆍ전승 초기 가부키는 극문학으로 정착된 드라마가 아니라 극단장이 줄거리와 역할을 말로 각 배우에게 들려주고 즉흥적으로 연극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는 전업화한 프로배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말하자면 신분, 직업, 연령, 선악의 성격에 따라 극중 배역이 정해져 있었다. 여기에 엄격한 기예를 추가한 배역이 계속 전해지면서 배우의 형(型)이 계승되었다. 후에 다른 역할을 겸한다든지 다른 배역을 하는 등으로 역할이 붕괴되었지만, 기예의 전승에 의한 연기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가부키와 서양연극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형(型)은 가부키의 중요한 특징이지만 동시에 큰 위험을 품고 있다. 이미 언급한대로 초보자라 하더라도 배역의 형(型)에 맞추기만 하면 되지만 프로들의 가부키에서는 그대로 모방만 하는 형(型)의 무대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른바 ‘형(型)에 들어가서 형(型)을 나오라’는 말이 있다. 유명한 가부키 배우였던 마쓰모토 고시로가 스승인 단주로에게 춤 연습을 보였을 때였다. 그는 <야스나(保名)>라는 극의 ‘들녘 아지랑이 가을 풀을’이라는 대목에서 스승이 하는 대로 새끼손가락과 약손가락을 구부려서 부드러움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러자 단주로가 그 손을 탁 치며 나무랐다. “지금 그 자세는 나의 모방이다. 내 새끼손가락은 펴지지 않는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약손가락이라도 굽혀서 부드러움을 살리려 한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모방을 하는 주연이 어디 있느냐.” 이처럼 창조가 가미되지 않는 형(型)을 명배우들은 허용하지 않았다. 부정미(否定美)의 창조 가부키는 선(善), 정(正), 애(愛)와 같이 인생에 있어 긍정적인 것들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뿐 아니라 잔혹성과 악, 불륜, 비정함 등이 소용돌이치는 처참한 부정의 세계도 공연한다. 이것은 미(美)의 개념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의미로는 전위적인 근대미술 본연의 모습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정적인 내용을 극이라는 예술기법을 통해 미(美)로 전환한다는 뜻이다. 이를 ‘역이용의 미’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름다움 자체는 윤리적 감명을 갖는 고상한 것이지만, 표현하는 수단과 형식이 반드시 고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즉 가부키는 인생의 밝은 부분만이 아니라 어두운 부분도 비추어봄으로써 그 진실을 그려낸다. 잔혹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피’이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영국이나 스페인 등의 대중적 바로크연극에서는 인간의 장기를 끄집어내는 연기가 생생하게 묘사되며, 잘 응고되지 않는 양의 피를 사용하여 그 사실감을 더해준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소방목이라는 붉은 목재를 짠 즙을 이용하여 피를 묘사한다. 피의 참극은 이렇듯 동서를 불문하고 존재하는데 여기에도 가부키와의 차이점이 있다. 서양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종교적인 교화라든지, 본보기, 혹은 드라마의 극적 효과를 위해 잔학성을 묘사하는데, 가부키에서는 참극 자체를 미의 대상으로 양식화하여 그것을 감상하도록 제공한다. 그 예로 <여름축제 오사카의 귀감>을 들어보겠다. 생선가게 주인 단시치 구로베는 마을의 야쿠자이다. 그는 전과자이지만 큰 은혜를 입고 있는 젊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군의 애인이 납치되었다. 탐욕스런 노인 기헤이지가 나쁜 사무라이에게서 돈을 받고 주군의 애인을 가마에 태워서 가버린 것이다. 기헤이지는 단시치의 장인이었다. 단시치는 주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장인을 쫓아가 주군의 애인을 놔주라고 한다. 그러자 장인은 방해받은 것이 분이 나서 시비를 걸었고, 단시치는 장인을 달래기 위해 30냥을 준다고 말하고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단시치는 장인에게 약속한 돈을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붙었고 격분한 장인은 단시치를 진흙바닥에 넘어뜨리고 짓밟기 시작했다. 단시치는 구타에 방어하기 위해 호신용 칼을 뺐으나, 그만 실수로 장인을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는 “살인자!”하고 외치는 장인의 입을 눌러 마지막 숨을 끊는다. 단시치는 “장인어른 용서를‥‥”하면서 두레박의 물을 뒤집어쓰고 하나미치로 가서 미에를 취한다. 이때 담 건너편으로 신여(御與, 신위를 실은 가마)가 여러 개 지나간다. <여름축제 오사카의 귀감>에서 이 난투 장면이 제1막의 전부라 할 만큼 부정미의 최고조를 이룬다. 그것은 음감미와 시각미로 양식화된 ‘살해 장면’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단시치가 빼어든 칼이 번쩍일 때, 단시치의 겉옷이 벗겨지고 그의 등에 새겨진 용의 문신이 드러난다. 장인의 숨을 끊기 위해 단시치의 등이 움직여 질 때마다 그 문신은 살아서 움직이는 악마적인 조형미를 연출한다. 또한 비틀거리며 일어선 단시치가 우물가로 가서 두레박의 물을 뒤집어 쓸 때 바닥에 흐르는 피는 잔혹성을 극대화시킨다. 이어 부들부들 떨면서 겉옷을 걸친 단시치가 하나미치로 가서 미에(정지동작)를 취할 때 연출되는 반주소리와 신여는 단시치의 죄의식과 심장 박동소리를 표상한다. 가부키도 17세기 초나 현대에는 그 잔혹성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점은 괴기잔혹극은 결코 난세의 산물이 아니라 태평한 세상에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전쟁의 혼란이나 서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험 속에 빠져 있을 때는 피의 참극을 ‘픽션’으로 볼 여유가 없다. 이는 현실에서의 참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면, 전쟁이 일상과 멀어져가고 생명의 중요함이 안온한 일상 속에서 점차 잊혀 질 무렵, 피가 낭자한 연극과 원념 괴기극이 번영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극 속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행위와 이유 없는 살인이 난무한다. 이처럼 유혈극과 괴기극 따위가 생겨나는 바탕은 바로 허무와 권태로 침체되어 있는 태평성대인 것이다. 제3장 인간 보편의 드라마 조루리와 가부키 기다유 가부키는 인형극의 대본을 가져다 쓴 가부키로서 ‘조루리’극을 토대로 한다. 조루리 는 인형극이었으며 겐로쿠기(元祿期, 1688~1704) 시대에 지카마쓰 몬자에몬이라는 사람에 의해 극문학으로 완성되어졌다. 이후부터 약 50년간이 황금시대였는데, 거기에는 인형기술자인 ‘요시다 분자부로’의 공이 컸다. 그는 눈과 입이 움직이고 손발도 자유자재이며 나중에는 로봇에 버금갈 정도로 발달한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은 세 명의 남성에 의해 조종되었는데, 한 사람만이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나머지 두 사람은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 두건을 써서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또한 순수 가부키 대본이 배우를 위해 씌어진 것에 비해, 조루리는 전통을 잇는 소리의 문예 내지는 극문학으로 만들어졌다. 즉 낭독하는 사람인 다유(大夫)가 리더로서 노래 등을 읊었다. 기다유 가부키가 인형극에 바탕을 둔대 반해, 순수 가부키는 풍류춤을 토대로 하는 흉내내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원류에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조루리에 기원을 든 기다유 가부키는 슬픈 세상관을 근거로 한다. 즉 불교에서 온 무상관을 핵심으로 하는 염세사상, 우세관(憂世觀)에 일관되어 있다. 그 근본에는 윤회(輪廻)라는 사고관이 있는데, 우주는 십계(十界)라는 공간 축과, 삼세상(三世相)이라는 시간 축으로 이루어지며, 인간은 그 행위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십계란 지옥, 천상, 인간세계를 포함한 10곳의 세상을 말하며, 삼세상은 전세, 현세, 내세를 말한다. 반면에 순수가부키는 도쿠가와 초기의 ‘뜬세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시기(1600)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통일을 이뤄 사회 문화적으로 안정을 이루는 시기였다. 따라서 평화로운 현세향락의 기운이 서민생활에 큰 의미가 된 것이다. 애별리고의 비극 조루리를 극문학으로 완성시킨 지카마쓰는 1703년에 일본희곡 사상 더욱 새로운 방면을 개척하는 명작을 쓴다. 그것은 <소네자키 동반자살>이라는 작품인데, 이는 역사상의 인물이나 설화의 주인공이 아닌 시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일본 최초의 ‘시정극’이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간장가게의 점원 도쿠베와 기녀 오하쓰는 3년이 넘게 사귀어온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도쿠베는 자신을 유심히 보아온 주인에 의해 그의 조카딸과 결혼을 강요받게 되고, 오하쓰는 늙은 부자에게 팔려가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영겁의 사랑을 맺기 위해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이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극화한 것이었는데, 봉건사회의 모순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주인에 대한 의리로 인한 애별리고의 갈등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 조루리의 잔재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일본의 독자적 미의식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즉 작품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미치유키’가 그것이다. 미치유키(道行)란 작품 속에 허무한 상황과 주인공의 심리를 극중의 지지(地誌)나 지리(地理), 자연환경 등과 연관 지어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네자키 동반자살>의 미치유키에서는 ‘아다시가하라’는 길이 등장한다. 아다시노는 당시 화장터를 말했기에, ‘아다시가하라’라는 지명은 죽음을 향해가는 두 사람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다. 지카마쓰는 생애에 총 10권의 동반자살극을 썼는데 미치유키의 문구가 너무 아름답고 강하게 묘사되어 실제로 동반자살 사건이 점점 늘어났다. 그 결과 한참동안 동반자살극의 각색 상연이 금지 당하기도 했다. 양해와 체관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두 주인공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의지적으로 행동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로미오에게 무사히 편지가 도착하여, 로렌스 신부의 계략이 성공했다면,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죽음의 방식은 사랑하는 남녀로서 힘껏 살아간 결과로, 비극이라고는 하나 오히려 청춘을 구가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모세야마 온나테이키>의 비극은 그 성격이 다르다. 우선 내용을 살펴보면, 판사 기요즈미와 다자이는 서로의 자식을 맺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다자이의 죽음으로 인해 불화가 생겼다. 그러자 그들의 주군인 소가노 이루카 대신은 평소 흠모해 왔던 다자이의 딸을 빼앗고자 역모를 꾀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두 집안에 내린다. 기요즈미에게는 천왕의 비를 찾는데 아들을 출두시키라고 하고, 다자이의 미망인 사다타카에게는 딸을 자기의 측실로 들이라고 다그친다. 이미 이루카 대신의 계략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요시노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섰다. 그리고는 서로 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속마음을 넌지시 전달했다. 기요즈미는 천왕의 후궁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들이 결국은 고문당해 죽을 것이라는 것도 예견했다. 한편 사다타카 역시 딸이 이루카의 첩으로 들어가는 즉시 자결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절개를 지키고 깨끗이 죽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두 사람 사이의 암묵의 ‘양해’는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집에 돌아간 기요즈미는 아버지인 자신이 뒤에서 목을 쳐주겠다고 말하고, 고가스케에게 할복을 권한다. 한편 사다타가도 딸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절개를 지키라 말하고 딸의 목을 친다. 이 극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비극의 원인이 양가의 갈등이 아니라, 주종관계가 절대적인 봉건질서에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부모간의 양해와 부모자식 간의 양해가 몇 번이고 반사해서 비추게 된다. 또한 그 속에는 주군의 절대적인 명령 하에 더 이상 선택의 길이 없는 ‘체관’이 담겨져 있다. 이 극에서와 같이 가부키는 충신이나 무장이 아무리 많이 등장해도 결코 전쟁이나 충의를 찬미하거나 고취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사상 최초의 가부키 한국 공연이 실현되었다. 상연목록은 한국의 요청에 따라 <주신구라>와 <대신하는 좌선>이라는 무사세계의 극이었다. 그러자 무사도(武士道)를 고취하는 호전적인 연극을 왜 상연하느냐는 질문이 많이 나왔다. 그때 문예고문으로서 동행했던 필자가 이 극은 서민의 드라마로서 성립한 극이라는 점을 설명하느라 애를 썼다. 현세에 살아 있는 사실주의극 음울한 장면묘사도 에도 말기 가부키의 특징 중 하나였다. 주인공이 도둑, 살인범, 매춘부 등의 무법자로 대체되면서, 공갈협박이나 살인, 정사 장면, 근친상간과 같은 부조리한 국면이 많이 묘사되었다. 하지만 같은 사실주의 작가라 할지라도 가와타케 모쿠아미는 난보쿠와 조금 달랐다. 그는 메이지유신이라는 대 변혁기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난보쿠의 뒤를 이었지만, 모쿠아미의 작품에는 난보쿠 작품의 주인공에게 결여되어있던 인간관계가 되살아나고, 애별리고라 할 수 있는 비극의 장면이 돌아온 것을 느낀다. 그리고 결말은 권선징악이며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가끔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로 건전했다. 물론 그의 작품에도 무법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의적으로 묘사되었다. 난보쿠와 모쿠아미를 그림으로 비교하자면, 난보쿠의 작품은 원색의 진흙물감을 두꺼운 붓에 묻혀서 한 번에 그린 지옥그림이고, 모쿠아미의 작품은 같은 지옥그림이라도 여러 가지 붓을 사용해서 완성한 일본화(日本畵)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자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각자가 활동했던 시대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난보쿠의 시대(1804~1830)는 시민문화가 난숙한 최성기(最盛期)였다. 반면 모쿠아미는 난보쿠보다 61년 후에 태어난 사람으로, 그가 작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에는 덴포의 개혁이 일어나서 풍기상의 탄압이 엄격했다. 그래서 모쿠아미는 양식미로 극의 성격을 부드럽게 하려 했던 것 같다. 난보쿠의 작품은 극히 리얼했지만 모쿠아미는 조루리에 기초한 기다유 가부키의 요소도 첨가하여 음감에 의한 가부키를 되살렸다. 즉 준악극적(準樂劇的)인 가부키 본래의 종합적 양식미의 전통을 되살려 ‘에도 가부키’를 매듭지었다. 이처럼 가부키는 지카마쓰에 의한 조루리의 드라마 성립에서부터 모쿠아미의 도둑극까지 각각의 시대를 반영해서 변화했다. 그로인해 풍부하고 다채로운 작품으로 진화할 수 있었고, 기예를 비롯한 배우의 자질이 육체적 전승에 의해서 현대에 이어짐으로써 가부키 연극은 그 독창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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