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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부키/Kabuki _歌舞伎/가부키죠

음악의향기 2008. 12. 1. 07:38

                 Kabuki /가부키/ 歌舞伎/가부키죠

 

 

 가부키만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 1889년에 세워졌다가 관동대지진과 뒤이은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51년에 재건되었다. 공연을 모두 관람할 수 있지만 이것이 부담스러운 경우에는 입장료 ¥1000 정도만 내고 흥미있는 막만을 골라 관람할 수 있다. 가부키에 대해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면 입구에서 가이드 이어폰을 빌리면 된다. 영어와 일본어로 안내되는 이어폰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할 수 있다. 

 

 


가와타케 도시오 지음 / 최경국 옮김

▣ 저자  가와타케 도시오

 

1924년 도쿄에서 태어난 저자는 가부키의 학술적 연구체계의 기초를 마련한 가와타케 시게토시의 아들이며, 에도 가부키 작가의 거장인 가와타케 모쿠아미의 손자이기도 하다. 1948년 도쿄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비교연극학 연구에 매진했으며, 와세다대학 교수가 된 1964년부터는 후학양성에 힘썼다. 퇴임 후에는 빈 대학에 객원 교수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강연을 실시했고, 특히 가부키와 일본 전통극인 노(能)의 해외 공연의 문예고문을 맡아가며 가부키를 해외에 알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의 저서는 80여 권에 달하는데, 그 중 『비교 연극학』,『일본의 햄릿』,『연극 개론』,『가와다케 도시오 가부키론』 등은 학술적 명저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 역자  최경국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일본어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ㆍ비교문화와 표상문화론을 전공하여 석ㆍ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명지대학교 일어 일문학과 교수로서, 사회교육원 교학부장, 학생처장을 거쳐 문화콘텐츠연구소장으로 재임 중이다.

▣ Short Summary
가부키는 일본 에도시대부터 400년 동안 민중에 의해 만들어지고 길러진 일본의 전통예능이다. 따라서 일본인의 정신과 문화양식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고 하겠다. 아직 한국에는 가부키가 충분하게 소개된 적이 없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자주 공연되고 또한 각광을 받고 있다. 언어와 사회상황이 다른 외국에서 가부키가 이처럼 환영을 받는 이유는 가부키가 어느 민족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감동을 담고 있고, 그것을 충분히 관객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가부키는 다른 나라의 연극이 단지 앞쪽의 사각무대에서만 공연되는 것과 달리, 극장 전체를 하나의 극으로 연출시키는 극장성(Theatricality)을 지니고 있다. 동시동작 효과를 표현하기 위한 회전무대나 배우를 무대 밑에서 등장시키는 엘리베이터(세리), 또한 객석 안으로 연결된 보조무대(하나미치) 등의 기구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무대 배경과 배우의 성격을 나타내는 문신(구마도리), 여성역할을 하는 남자배우(온나가타) 등은 충분히 관객을 사로잡을 만큼 독창적이고 신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부키가 만인에게 통하는 연극으로 자리매김 하게 된 데에는 배우의 연기가 큰 역할을 했다.

가부키는 대사가 거의 없고 색과 형태와 소리를 동원해 드라마를 연출한다. 따라서 극이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배우의 탁월한 전문성이 필요하다. 서민 연극인 가부키 가 오늘날 전통양식의 확고한 계승과 더불어 현대 무대예술 창조에 기여하게 된 데에는 가부키 배우들의 ‘형(型)’의 전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기예를 모방하는 전승이 아니라 창조를 가미한 ‘형(型)’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부키가 세계 속에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모티브이다. 이 책은 가부키에 대한 낯설음만큼 신선한 흥미도 주지만, 일본의 가부키가 글로벌 예술로서 터를 잡은 것과 같이, 한국의 고전극이 세계성을 얻기 위한 참고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 차례
머리말  밖에서 본 가부키

제1장  자유자재로운 연극 공간
독자적인 극장기구
하나미치가 만들어내는 공감과 극장성
하나미치의 어원과 성립
회전무대의 다이너미즘
서민을 위한 환락의 장

제2장  양식미와 종합예술
종합예술로서의 가부키
음감미의 세계 / 시각미의 세계
배우ㆍ역할ㆍ온나가타
예(藝)ㆍ형(型)ㆍ전승
부정미(否定美)의 창조

제3장  인간 보편의 드라마
조루리와 가부키
애별리고의 비극
양해와 체관의 비극
현세에 살아있는 사실주의극

맺음말  세계 속의 가부키

가부키
가와타케 도시오 지음 / 최경국 옮김
창해 / 2006년 1월 / 362쪽 / 18,000원

제1장  자유자재로운 연극 공간

독자적인 극장기구
일본 전통연극의 특색은, 연극의 종류에 따라 극장의 양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서양의 근대극이 사각형 무대 위에서 상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의 전통연극은 무대기구도 포함하는 종합예술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시작된다. 예를 들면 무대에는 극의 동적인 변화를 주는 회전무대가 있고, 무대 마루 밑에는 나락(奈落)이 있어 이곳에 배우가 대기한다. 또한 하나미치(假花道)라고 하는 보조무대가 있는데, 이것은 외국은 물론 일본의 다른 연극에도 없는 가부키의 본질, 특질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미치는 무대의 정면 왼쪽에서부터 객석 옆으로 길게 연결된 복도와 같은 무대이다. 폭은 1.5미터 정도이고 무대와 같은 높이이므로 객석에서는 올려다보도록 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지 통로가 아니라 중요한 연기공간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극이 절정에 이를 무렵 주인공 등이 배경음악에 맞춰 이곳에 등장한다.

하나미치에서 배우의 등장은 슷폰이라는 출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미치 무대 밑에 대기 중인 배우가 극적인 순간에 슷폰을 통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미치의 등장장면이나 연기를 ‘데하(出端)’라고 하는데, 가부키 극의 성공여부가 ‘데하’의 한순간에 달려 있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미국 사람들을 감동시킨 <주신구라> 공연에서는 주인공이 4막이 진행될 때에서야 하나미치에 처음 등장했다. 하나미치의 존재 가치는 무대공간을 객석 속으로 펼침으로써 극장 전체를 하나의 ‘연극 공간’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극이 진행되는 도중 극적인 순간에 주인공이 하나미치에 등장하면 객석에서는 “맛테마시타(기다렸습니다!)”하고 일제히 소리친다. 객석에서 자발적으로 환영의 추임새를 넣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연극에는 없는 가부키만의 독특한 생동감이다.

가부키 연극의 또 다른 특징은 대사를 포함한 연기가 항상 무대에서 객석을 향해 수직으로 꽂힌다는 점이다. 과거에 하나미치에는 객석 쪽으로 뛰어나온 나노리다이(名乘)이라는 받침대가 있었다. 이곳에서 배우는 자기소개나 사물의 취지와 유래 등을 음악적으로 표현했다. 후에 나노리다이는 폐지되었지만 오늘날에도 가부키 극에서는 상대배우에게 말할 대사를 객석을 향해서 말한다. 서양연극에서 셰익스피어가 이러한 수직형이지만, 서양의 주류를 이루는 리얼리즘 연극에서는 배우가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극 속의 인물로서 행동한다. 즉 연기공간이 무대 안으로 한정되어 있다. 반면에 일본의 전통연극은 음악을 포함한 연기 연출과 무대, 극장의 구조기능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전체가 하나의 극을 이룬다.

가부키는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이 공감하고 서로 접하는 Theatricality의 연극이다. 시어트리컬러티(Theatricality)는 극장 전체가 연극 공간으로 바뀌어버리는 성질, 즉 극장성이다. 이는 본래 서커스 등도 포함된 광의의 의미인데, 말하자면 대사에 의한 드라마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외견상의 아름다움이나 귀를 즐겁게 하는 음감 등, 풍부하고 다채로움으로 극장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공감의 장소가 되어버리는 -연극 본래의 성질- 것을 말한다.

하나미치의 성립
가부키는 1603년, 오쿠미라는 여성이 창시한 ‘염불춤’을 공연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 염불춤은 신사(神社)의 경내나 강변 혹은 노천의 조잡한 가설무대에서 주로 흥행했는데 그것은 일본의 전통극인 노(能)의 무대를 모방한 것이었다. 하지만 노(能)와 가부키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다. 노(能)는 주로 가면을 쓰는데, 가부키는 맨 얼굴에 분장을 한다. 또한 노(能)의 가면은 신, 귀, 망령 등 모두 이차원의 존재를 표상하지만, 가부키의 등장인물은 인간으로 등장한다. 노(能)의 무대에도 하나미치의 기원이 되는 긴 통로가 있었는데 이를 하시가카리라고 한다. 그러나 노(能)의 하시가카리는 연기를 위한 무대가 아니라 천상 무한의 저편에서 건너오는 다리, 즉 저세상과 연결하는 다리로서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 증거로 하시가카리를 비롯한 노(能)무대 전체에는 흰모래와 자갈을 깔아 무대와 객석을 천상계와 지상계로 구분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노(能)는 천상적이고, 가부키는 지상적이다.

가부키의 진화와 더불어 하시가카리도 오늘날의 하나미치로 변화하게 되었다. 1629년, 오쿠니를 비롯한 여성가부키는 풍기문란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몇 차례의 탄원 끝에 1653년, 두 개의 조건 하에 재개 허락을 받았다. 그 하나는, 미소년 배우의 전발(前髮, 결혼 전의 사내아이가 이마 위로 땋아 얹는 머리)을 자를 것, 또 하나는 호색성이 강한 춤이 아닌 ‘흉내 내기(어떤 인물로 분장하여 재현하는 일)’를 주로 한다는 조건이었다. 강제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로써 가부키는 본격연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664년부터 막이 설치되고, 무대장치 등, 극을 위한 도구의 발달이 진행되면서 하시가카리의 폭을 넓혀 본무대로 흡수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나미치가 비로소 연기장소가 된 것은 1684~1704년, 즉 17세기 말이었던 것 같다. 1687년에 그려진 <나카무라 극장의 두 배우>라는 그림을 보면 하시가카리의 위치에 반주자들이 나란히 앉아 있고, 무대높이에서 객석 쪽으로 연결된 또 하나의 통로 위에 가마와 두 배우가 그려져 있다. 즉 하나미치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해외 공연을 시작한 초기에는 하나미치 설치를 위한 필요성을 납득시키는데 무척 고생을 했다. 예를 들면 러시아 초연에서는, 객석이 줄어들면 채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극장 측이 하나미치를 설치해 놓지 않았다. 다행히도 통역이 가부키 연구가였던 덕에 겨우 납득시킬 수 있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소방법 때문에 객석을 통과하는 가설물 허가가 나오지 않아 지금도 무대에 가까운 출입구 쪽으로 하나미치를 사선으로 가설할 수밖에 없다.

회전무대의 다이너미즘
하나미치가 확립된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1711~1736년경), 에도의 가부키 작가 나카무라 덴시치가 회전무대를 설치했다. 그는 사각으로 짠 목재 틀 안에 원형 나무틀을 끼워 겹치고, 여기에 수레를 연결시켜 돌렸다. 이를 개발하여 지금의 회전무대 원형을 만들어낸 사람이 가부키 작가인 나미키 쇼조(1730~1773)다. 쇼조는 많은 가부키 작품을 저술한데다가 공작에 재능이 많았다. 그는 덴시치가 개발한 원판을 개량하고, 배우들이 대기하는 무대 밑의 나락으로 연결하는 도르레를 설치하여 물레식 회전무대를 개발했다. 또한 무대 밑으로부터 배우를 등장시키는 엘리베이터와 같은 장치인 ‘세리’와 무대의 정경을 바꾸는데 바퀴를 달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등, 가부키의 다이내믹한 연출에 공헌했다.

회전무대 발명의 동기는 가부키에 다막, 다장면이 많아졌기 때문에 장면 전환을 빨리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회전무대는 기능 이상의 예술적 효과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회전무대는 복수 장면 등을 영화나 텔레비전의 동시동작 수법처럼 관객의 눈앞에서 전개해 보일 수 있다. 회전무대 외에 극 연출의 묘미를 더해준 것이 ‘공중타기(추노리)’이다. <요시쓰네 벚꽃 천 그루>라는 극에서처럼 인간이 여우로 변신하는 등의 장면에 공중타기가 이용되는데, 이는 무대에서 3층석 안쪽까지 쳐놓은 와이어를 통해서 연출된다. 가부키는 이처럼 하나미치, 회전무대, 세리, 공중타기 등 다양한 극적 장치로 연극 공간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서민을 위한 환락의 장
가부키는 배우의 매력을 제일로 치는 관능적인 극이었기에 가부키 극장은 환락의 장소로 불려 유학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8세기 중엽에 그려진 ‘나카무라 극장’의 그림을 보면, 1층 대중석에 승려와 여성, 직공풍의 젊은이, 밀짚모자를 눌러쓴 무사 등, 관람 층이 다양하다. 이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차이가 확실했던 시대였는데 이 그림은 가부키극장의 사민(士民)평등한 자유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또한 그만큼 환락의 장이었음도 잘 묘사하고 있다. 관객 속을 누비는 안내원이 과자나 도시락을 팔고 있고, 객석에서는 술을 마시거나 곰방대를 피우면서 수다를 떠는 여성이 있다. 또한 2층에는 반나체의 남자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 이렇게 예의 없는 관객을 상대로 연극을 하려면 배우의 목소리와 동작이 크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연기력도 뛰어나야 객석을 집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가부키의 과장된 양식은, 이렇게 무례한 관객에 의해 단련되고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가부키의 또 다른 맛인 음식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가베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과자와 도시락과 초밥의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지금은 스모 경기장 주변에만 겨우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가부키 공연장 근처에 찻집이 있어서 돈 많은 관객들은 이곳의 좌석을 예약해놓고 가부키 공연을 보았다. 즉 여기서 차와 술을 마시고 가베스를 먹고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본다. 그리고 긴 막간 시간을 이용하여 찻집에 다시 돌아와 정식 요리를 먹고 또 연극이 끝나면 여기서 야식을 먹고 집에 돌아갔다. 가베스의 즐거움은 가부키 극장이 의자석이 되고 나서 찻집과 함께 소멸했는데 지금도 식사휴게가 가부키 관람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는 것은 당시의 잔재일 것이다.

환락의 장이었던 가부키 극장도 메이지 시대가 되자 문명개화의 물결 속에서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72년, 메이지 신정부는 여러 가지 권고와 통달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상류의 귀족이나 외국인이 구경 오는 것을 의식하여 고상한 연극을 권장하고, 교육에 도움이 되는 사실본위의 극을 만들도록 했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관객의 동화(同化)를 너무 진행시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즉 극에 대한 동화가 너무 진행되면 관객이 배우를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1909년, 시카고의 한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명작 <오셀로 Othello>가 상영되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바트라는 명배우가 악당 이아고 역할을 하였다. 극이 진행되고 이아고가 오셀로 장군의 부인을 죽이려고 결심했을 때, 갑자기 객석에서 정의에 투철한 청년 장교가 이아고를 향해 총을 쏘았다. 곧 윌리엄 바트는 무대에 쓰러졌고 그대로 절명했다. 대혼란이 일자 제정신을 차린 청년 장교는 권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쏘아 자결하였다.

일본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사쿠라이라는 무사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이를 걱정한 부모는 바깥 활동을 권유하였고 사쿠라이는 친구들과 함께 <덴지쿠 도쿠베>라는 연극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극에서는 주인공이 늙은 어머니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효자인 사쿠라이는 이 장면을 보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그리고 곧 출입구에 맡겨놓은 칼을 되찾아 “괘씸한 놈!”이라고 소리치며 무대로 뛰어갔다. 그때 그를 제지하러 뛰어나온 남자 스텝의 어깨에 칼이 내리꽂히면서 결국 즉사하였다. 도쿠베를 연기하던 배우는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사쿠라이는 죽이지 못하여 억울하다며 할복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지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 참극 이후, 시카고에서는 총을 쏜 청년과 총에 맞은 배우를 하나의 묘에 매장하여 비를 세우고 이렇게 새겼다. ‘이상적인 배우와 이상적인 관객을 위하여!’ 한편, 일본의 경우는 사쿠라이의 부모가 중재자를 통해 백 냥의 금을 내놓고 은밀히 처리하였다. 가부키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관객에게 제시하거나 사상을 고취시키는 극이 아니다. 단지 서민 누구나가 픽션의 세계에서 울고 웃으며 위안을 얻는 장인 것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가부키는 하나미치를 통해 배우와 관객이 교감하는, 말하자면 동화작용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부키는 무대가 객석과는 별도의 픽션임을 인식시키는 이화(異化)의 역할도 한다. 즉 관객이 몰입할 것 같으면 머리에 찬물을 끼얹듯이, 회전무대나 음악이나 깜짝 놀랄 만한 장면을 불시에 연출하여 동화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제2장  양식미의 종합예술

음감미의 세계
가부키는 ‘노래(歌)’와 ‘춤(舞)’과 ‘연기(伎)’의 3요소가 종합되어 이루어지는 예술이라는 의미에서 ‘歌舞伎’라 명명되었다. 즉, 가부키는 음감과 춤, 몸짓 연기에 바탕을 둔 종합예술이다. 그중 음감의 특색은 각종 악기로부터 음악적 대사까지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먼저 가부키에는 ‘탁(柝)’이라는 박자목이 있는데, 그것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난다고 할 정도로 그 쓰임이 많다. 예를 들어 극의 시작신호부터 배우의 준비신호, 개막알림, 무대의 회전 등, 극 진행의 전 과정에 쓰인다. 박자목을 치는 악기는 ‘부부(夫婦)’라고 하는데, 이는 잘 마른 가시나무를 잘라서 서로 등을 맞댄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부’를 탁 치면  안쪽에 볼록 튀어나온 한 점이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는데, 진동수가 같아서 공진하여 크고 아름답게 울리는 소리를 낸다. 박자목을 치는 역할은 가부키 작가가 하며, 극 연습이나 무대 진행, 그리고 배우에게 건네주는 대사 제작도 함께 맡는다.

가부키에서 샤미센(三味線)이라는 악기도 매우 중요하다. 가부키에 샤미센을 쓰지 않는 무대는 없다. 샤미센은 네 개의 판자를 합친 통에다 긴 지판을 달고, 그 위에 비단실로 꼰 세 줄의 현을 단 것이다. 샤미센은 본래 일본 악기가 아니라 외래품을 개량한 것이다. 원래는 이집트가 원산지인데, 1558 ~1570년경 오사카 항구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몸체에 양의 가죽을 붙였으나 이것이 서아시아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뱀가죽을 덮게 되었고, 일본 본토로 들어오자 큰 뱀이 없었기 때문에 고양이 가죽을 붙이게 되었다. 그때까지 현악기의 주류였던 비파보다 휴대가 용인한데다 경묘하고 섬세한 음색을 내므로 도쿠가와 시대의 서민들이 많이 애용했다.

가부키 음악은 ‘게자 음악’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무대 왼쪽의 구로미스(반주음악을 하는 곳)의 위치를 게자(下座, 아랫자리)라고 표현했기 때문인 것 같다. 구로미스음악(반주음악)의 종류는 2천 6백여 곡 정도 되며, 그것은 관현 타악기에 의해 연주된다. 말하자면 대소고적(크고 작은 피리와 북)을 중심으로 호궁, 쟁, 퉁소, 징, 조종, 꽹과리부터 목어, 시계, 오르골(자명금) 등 다종다양한 악기로 구성된다. 그중 샤미센과 함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큰북이다. 큰북의 쓰임새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시각을 알리거나, 전투시작, 씨름 개장 등을 알린다. 한편, 비, 바람, 번개, 파도소리 등 자연현상에 관한 효과음이나 분위기 조성의 의음(擬音)적 효과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오로지 큰북만을 쳐서 표현하는데 극 전개와 함께 듣고 있노라면 정말 그 소리처럼 들린다.

가부키는 효과음이나 배경음악뿐만 아니라 대사 자체도 음악적이다. 아무리 사실미가 강한 내용이라도 일상의 회화로 진행되지 않는다. 대사는 시를 읊는 것처럼 전달되는데, 그 음감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방식이 ‘칠오조’이다. 칠오조는 과거의 하이쿠(5·7·5·7음을 정형으로 하는 시)나 오늘날의 엔카(일본의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일본시의 기본형이다. 따라서 가부키 속의 칠오조는 하이쿠와 함께 일본 리듬의 전통을 서민문화 속에 꽃피웠다고 할 수 있다.

시각미의 세계
가부키를 처음 보는 외국인들은 막이 오르자마자 놀라서 환성을 지르고야 만다. 바로 색채의 화려함 때문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객석에 ‘딱’하고 개막을 알리는 박자목 소리가 들리면 막이 열리면서 대낮처럼 밝은 조명이 모두 켜진다. 그때 무대장치와 의상, 화장, 소품들까지 모든 요소가 색채의 배합으로 설정된 화려한 무대가 한순간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노(能)와 비교하면 한층 더 선명해진다. 노(能) 무대는 배경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 등 극히 상징적인 장치로 표현한다. 엄격하게 간소화된 노(能)의 무대는 수묵화와 같은, 말하자면 중세 무사문화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이에 비해 끝없이 다채로움을 추구하는 가부키의 미의식은 ‘찬란한 비근미(卑近美)’라 할 수 있다.

가부키의 색채 중에서도 붉은색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꽤 재미있다. 원래 붉은 색은 원시적인 색으로, 결코 고급스럽다고는 할 수 없다. 유치하고 야만적이며, 피를 연상시키고 악마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붉은 색은 가부키 미(美)의 본질적인 요소이기도 한 성적 매력에 깊이 관여한다. 가부키의 이른바 아카히메(赤姬)는 가부키에서 여자 혹은 귀인역의 총칭인데, 이들은 대개 붉은 색 옷을 입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또한 허리띠나 기모노 안으로 보이는 하의 또는 속옷 등이 붉은 색인걸 보면 그것이 관능미를 표현하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엿볼 수 있다.

가부키의 시각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은 구마도리(힘을 강조하기 위해 얼굴에 선을 그리는 화장)이다. 이는 특수한 배역에 한정되어 있는데도 매우 특이하고 강렬해서 책표지나 포스터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등, 가부키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구마’란 음영(陰影)을 말한다. 하얗게 칠한 얼굴에 골격을 따라 색을 넣어 선을 그리고, 한쪽을 엷게 칠하여 근육과 그림자를 나타낸다. 그 색이나 선의 수, 굵기, 형태 등에 따라 배역의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다. 구마도리를 하는 배역은 초인적인 힘을 가진 호걸이나 이에 대항하는 악당들이다.

중국의 경극에도 구마도리와 비슷한 검보(瞼譜)라는 화장법이 있으며,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각지에도 다채로운 화장법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구마도리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다른 나라의 분장에서는 얼굴을 여러 가지 색으로 명확한 경계선을 그어 빈틈없이 칠한다. 적어도 인간의 표정을 없애고 인간 이외의 대상을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일본의 구마도리는 진한 곳과 흐린 곳의 농담(濃淡)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을 강조하려 한다. 여기에 시현(示顯)이라는 양식적 자연주의 이념이 작용하고 있는데, 뉴욕타임즈에 실린 평을 보면 서양연극이 재현(representation)인 것에 비해 가부키는 시현(示顯, presentation) 연극이라 했다. 여기서의 시현은 현실의 나타냄이 아니라, 그 본질을 제시하고 표현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 언뜻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으로 보이는 ‘구마도리’가 실제로는 성격묘사의 리얼리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구마도리와 연관되어 형성된 가부키의 특징은 ‘미에(見得, 정지 동작)’이다. 미에는 신체를 조각처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하는 연기 수법으로, 배우가 동작 중간 중간에 포즈를 취하고 몇 초 동안 정지하는 연기방식이다. 중국의 경극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동작인데, 중국의 ‘미에’는 갑자기 정지하고 다시 갑자기 움직이는 불연속적이고 직선적인 동작인 반면, 가부키는 부드러운 선을 그려가며 몸을 움직이다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했을 때 딱 정지하는 곡선적이고 부드러운 멋을 풍긴다. 미에는 인물 사이에서 심리적 긴장이 있을 때도 연출되는데, 중간막이 끝날 때 중요 인물 여럿이 미에를 하게 되면 긴장의 상황에 대한 복선을 의미한다.

서양극과 일본 극의 차이는 해외 공연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과거의 극에서는 시간을 묘사할 때, 대사를 통해 관객의 머릿속에 밤을 재현시켰다. 하지만 조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가부키는 이런 식으로 상황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암흑 속에서 칼싸움하는 장면을 연출할 때도 가부키는 더듬거리는 몸짓으로 칼을 집는다거나 밤을 연상시키는 대사를 통해 상황을  시현한다. 서양에서 공연을 할 때면 현지 극장 관계자들은 하나미치의 설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연출 방식을 좀처럼 납득하지 못하고 당황스러워 한다.

배우ㆍ역할ㆍ온나가타
과거에 절과 신사가 발달했을 무렵, 법회나 제례 등의 행사에서 여러 역할을 담당하는 신관이나 승려, 그중에서도 특히 예능으로 봉사하는 사람을 야쿠샤(役者)라 칭했다. 이를테면 야쿠샤는 성직자였기 때문에 비속한 의미가 아니다. 한편, 배우라는 호칭은 야쿠샤보다 훨씬 오래되었는데 그 어원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을 표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일본에서는 노(能) 이래 야쿠샤(役者)란 말이 널리 사용되었고, 배우(俳優)를 표기할 때도 음은 야쿠샤로 읽는 경우가 많았다.

가부키의 배우는 남자만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 여자 역할을 하는 남자배우를 온나가타(女方)라 칭한다. 온나가타는 하나미치의 존재와 함께 가부키 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 가부키는 여자배우가 주체가 되는 예능이었다. 여기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즉 도쿠가와에 의해 바쿠후가 수립되고 정치 중심이 에도로 옮겨지면서 갑자기 진공지대가 된 교토의 해방 무드가 관능적인 여성예능인의 진출을 허용하게 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종의 자유로운 허탈 상태 속에서 스트립쇼가 탄생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관능미를 구가했던 여자 가부키는 유학자들의 빈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매춘이라는 폐단도 생겨났고, 유녀들에 의한 동종의 예능단도 잇달아 생겨났는데, 그 모습이 유곽의 하리미세(長見世, 유녀들이 늘어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되었다. 또한 그 폐해는 무사계급에까지 미쳤다. 높은 신분의 사무라이가 신분을 숨기며 가부키 극장에 드나들었고, 성주가 외국인 접대용으로 가부키 배우들을 사유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다다나오가 가부키의 여자배우를 고액으로 사들인 일이 발각되었다. 이후 곧 풍기문란을 이유로 가부키가 금지되었으나 근본 이유는 바쿠후(군사정부)의 위신이 실추되고, 마침내는 봉건체제에 금이 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여자 가부키가 26년간의 역사로 모습을 감추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바로 ‘와카슈(미소년) 가부키’이다. 일본 예능은 예로부터 남자가 담당하였고, 이미 미소년 예능도 있었다. 다만 여자 가부키가 없어짐으로써 미남자 가부키가 융성해졌을 뿐이었다. 고전 가부키를 통해 여자의 매력을 알아버린 관객들은 더욱 여성의 요염함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미소년들은 예쁘게 머리를 묶고 화장을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아름다움과 요염함을 겨루게 되었다. 이에 관객들은 군침을 흘리고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는 등, 그 색정 폐해는 무사와 승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와카슈 가부키도 전면 금지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653년, 와카슈가 배제되고 온나가타가 포함된 새로운 가부키가 재개된다. 이때부터 가부키는 예술본위의 본격 연극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예(藝)의 창조와 전승도 마침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예(藝)ㆍ형(型)ㆍ전승
가부키 특유의 요염하고도 아름다운 온나가타는 완전한 여성이 되려는 노력에서 출발했다. 예를 들어 온나가타는 도시락 같은 것도 대기실 한쪽에서 먹는다. 음식을 게걸스럽게 집어먹은 뒤 곧바로 무대에 나가 여성 역할을 한다면 그 역할에 대한 진정한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생을 여자로 살지 않으면 훌륭한 온나가타가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노력을 기울인다. 외국에서도 남자의 여장 연극 시대가 있었으나 이는 변성기 전의 소년 배우들이었다. 중국의 경극에서도 남성이 여성 역할을 하지만 가성을 쓴다는 점에서 가부키와 다르다. 가부키에서 온나가타는 남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야 한다. 즉 남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여성미를 표현하려고 하는 지극히 어려운 예(藝)의 정진이 필요하다.

초기 가부키는 극문학으로 정착된 드라마가 아니라 극단장이 줄거리와 역할을 말로 각 배우에게 들려주고 즉흥적으로 연극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이는 전업화한 프로배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말하자면 신분, 직업, 연령, 선악의 성격에 따라 극중 배역이 정해져 있었다. 여기에 엄격한 기예를 추가한 배역이 계속 전해지면서 배우의 형(型)이 계승되었다. 후에 다른 역할을 겸한다든지 다른 배역을 하는 등으로 역할이 붕괴되었지만, 기예의 전승에 의한 연기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가부키와 서양연극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형(型)은 가부키의 중요한 특징이지만 동시에 큰 위험을 품고 있다.

이미 언급한대로 초보자라 하더라도 배역의 형(型)에 맞추기만 하면 되지만 프로들의 가부키에서는 그대로 모방만 하는 형(型)의 무대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른바 ‘형(型)에 들어가서 형(型)을 나오라’는 말이 있다. 유명한 가부키 배우였던 마쓰모토 고시로가 스승인 단주로에게 춤 연습을 보였을 때였다. 그는 <야스나(保名)>라는 극의 ‘들녘 아지랑이 가을 풀을’이라는 대목에서 스승이 하는 대로 새끼손가락과 약손가락을 구부려서 부드러움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러자 단주로가 그 손을 탁 치며 나무랐다. “지금 그 자세는 나의 모방이다. 내 새끼손가락은 펴지지 않는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약손가락이라도 굽혀서 부드러움을 살리려 한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모방을 하는 주연이 어디 있느냐.” 이처럼 창조가 가미되지 않는 형(型)을 명배우들은 허용하지 않았다.

부정미(否定美)의 창조
부정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가부키 연기 연출의 형식과 정신에서 양극을 이루는 ‘아라고토’와 ‘와고토’를 관찰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아라고토’는 악을 물리치는 정의로운 무사와 같은 주인공을 말한다. 그들은 과장된 분장에 구마도리를 하고 적갈색 무사 예복을 입고 높은 게타를 신고 있다. 또한 목소리, 박자, 웅변술이 필요하다. 한편 ‘와고토’는 돈과 권력이 따르지 않지만 사랑에 눈이 먼 주인공이라는 것이 기본 패턴이다. 가부키에서 이들은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가부키 무대를 만들어낸다. 즉 가부키는 양극단적인 인간의 본성을 표현함으로써 그 사이에 분포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아우르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가부키는 선(善), 정(正), 애(愛)와 같이 인생에 있어 긍정적인 것들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뿐 아니라 잔혹성과 악, 불륜, 비정함 등이 소용돌이치는 처참한 부정의 세계도 공연한다. 이것은 미(美)의 개념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의미로는 전위적인 근대미술 본연의 모습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정적인 내용을 극이라는 예술기법을 통해 미(美)로 전환한다는 뜻이다. 이를 ‘역이용의 미’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름다움 자체는 윤리적 감명을 갖는 고상한 것이지만, 표현하는 수단과 형식이 반드시 고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즉 가부키는 인생의 밝은 부분만이 아니라 어두운 부분도 비추어봄으로써 그 진실을 그려낸다.

잔혹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피’이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영국이나 스페인 등의 대중적 바로크연극에서는 인간의 장기를 끄집어내는 연기가 생생하게 묘사되며, 잘 응고되지 않는 양의 피를 사용하여 그 사실감을 더해준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소방목이라는 붉은 목재를 짠 즙을 이용하여 피를 묘사한다. 피의 참극은 이렇듯 동서를 불문하고 존재하는데 여기에도 가부키와의 차이점이 있다. 서양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종교적인 교화라든지, 본보기, 혹은 드라마의 극적 효과를 위해 잔학성을 묘사하는데, 가부키에서는 참극 자체를 미의 대상으로 양식화하여 그것을 감상하도록 제공한다. 그 예로 <여름축제 오사카의 귀감>을 들어보겠다.

생선가게 주인 단시치 구로베는 마을의 야쿠자이다. 그는 전과자이지만 큰 은혜를 입고 있는 젊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주군의 애인이 납치되었다. 탐욕스런 노인 기헤이지가 나쁜 사무라이에게서 돈을 받고 주군의 애인을 가마에 태워서 가버린 것이다. 기헤이지는 단시치의 장인이었다. 단시치는 주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장인을 쫓아가 주군의 애인을 놔주라고 한다. 그러자 장인은 방해받은 것이 분이 나서 시비를 걸었고, 단시치는 장인을 달래기 위해 30냥을 준다고 말하고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단시치는 장인에게 약속한 돈을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붙었고 격분한 장인은 단시치를 진흙바닥에 넘어뜨리고 짓밟기 시작했다. 단시치는 구타에 방어하기 위해 호신용 칼을 뺐으나, 그만 실수로 장인을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는 “살인자!”하고 외치는 장인의 입을 눌러 마지막 숨을 끊는다. 단시치는 “장인어른 용서를‥‥”하면서 두레박의 물을 뒤집어쓰고 하나미치로 가서 미에를 취한다. 이때 담 건너편으로 신여(御與, 신위를 실은 가마)가 여러 개 지나간다. 

<여름축제 오사카의 귀감>에서 이 난투 장면이 제1막의 전부라 할 만큼 부정미의 최고조를 이룬다. 그것은 음감미와 시각미로 양식화된 ‘살해 장면’ 때문이다. 설명하자면, 단시치가 빼어든 칼이 번쩍일 때, 단시치의 겉옷이 벗겨지고 그의 등에 새겨진 용의 문신이 드러난다. 장인의 숨을 끊기 위해 단시치의 등이 움직여 질 때마다 그 문신은 살아서 움직이는 악마적인 조형미를 연출한다. 또한 비틀거리며 일어선 단시치가 우물가로 가서 두레박의 물을 뒤집어 쓸 때 바닥에 흐르는 피는 잔혹성을 극대화시킨다. 이어 부들부들 떨면서 겉옷을 걸친 단시치가 하나미치로 가서 미에(정지동작)를 취할 때 연출되는 반주소리와 신여는 단시치의 죄의식과 심장 박동소리를 표상한다.

가부키도 17세기 초나 현대에는 그 잔혹성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점은 괴기잔혹극은 결코 난세의 산물이 아니라 태평한 세상에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전쟁의 혼란이나 서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험 속에 빠져 있을 때는 피의 참극을 ‘픽션’으로 볼 여유가 없다. 이는 현실에서의 참사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면, 전쟁이 일상과 멀어져가고 생명의 중요함이 안온한 일상 속에서 점차 잊혀 질 무렵, 피가 낭자한 연극과 원념 괴기극이 번영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극 속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행위와 이유 없는 살인이 난무한다. 이처럼 유혈극과 괴기극 따위가 생겨나는 바탕은 바로 허무와 권태로 침체되어 있는 태평성대인 것이다.

제3장 인간 보편의 드라마

조루리와 가부키
가부키는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크게 시대극과 시정극으로 나눌 수 있다. 즉 시대극은 귀족이나 무사, 영주 집안의 권력 쟁탈전을 다룬 것이고, 시정극은  서민이나 하층민 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 장에서는 시정극을 설명함으로써 가부키를 관철하는 서민 드라마의 본질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그 대표적인 예로서 기다유 가부키와 순수 가부키를 들 수 있다, 앞서 예(藝)의 작품세계에서 아라고토(영웅적 기개를 가진 주인공)와 와고토(사랑을 쫓는 유약한 주인공)라는 양극의 비교를 통해서 고찰한 바와 같이 기다유 가부키와 순수 가부키의 양자에 관한 대조적인 해석에 의해서 가부키 드라마 전체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겠다.

기다유 가부키는 인형극의 대본을 가져다 쓴 가부키로서 ‘조루리’극을 토대로 한다. 조루리 는 인형극이었으며 겐로쿠기(元祿期, 1688~1704) 시대에 지카마쓰 몬자에몬이라는 사람에 의해 극문학으로 완성되어졌다. 이후부터 약 50년간이 황금시대였는데, 거기에는 인형기술자인 ‘요시다 분자부로’의 공이 컸다. 그는 눈과 입이 움직이고 손발도 자유자재이며 나중에는 로봇에 버금갈 정도로 발달한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은 세 명의 남성에 의해 조종되었는데, 한 사람만이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나머지 두 사람은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 두건을 써서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또한 순수 가부키 대본이 배우를 위해 씌어진 것에 비해, 조루리는 전통을 잇는 소리의 문예 내지는 극문학으로 만들어졌다. 즉 낭독하는 사람인 다유(大夫)가 리더로서 노래 등을 읊었다.

기다유 가부키가 인형극에 바탕을 둔대 반해, 순수 가부키는 풍류춤을 토대로 하는 흉내내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원류에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조루리에 기원을 든 기다유 가부키는 슬픈 세상관을 근거로 한다. 즉 불교에서 온 무상관을 핵심으로 하는 염세사상, 우세관(憂世觀)에 일관되어 있다. 그 근본에는 윤회(輪廻)라는 사고관이 있는데, 우주는 십계(十界)라는 공간 축과, 삼세상(三世相)이라는 시간 축으로 이루어지며, 인간은 그 행위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십계란 지옥, 천상, 인간세계를 포함한 10곳의 세상을 말하며, 삼세상은 전세, 현세, 내세를 말한다. 반면에 순수가부키는 도쿠가와 초기의 ‘뜬세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시기(1600)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통일을 이뤄 사회 문화적으로 안정을 이루는 시기였다. 따라서 평화로운 현세향락의 기운이 서민생활에 큰 의미가 된 것이다.

애별리고의 비극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시대는 연극사뿐만 아니라 근세문화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즉 바쿠후(군사정권)를 수립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불교를 온존하면서 유교 도덕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런데 도쿠가와 정권이 무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수립한 봉건적 의리 관념이 새로운 비극적 성향을 낳게 된다. 과거에는 인과에 의한 우세관이 사회 관념을 대변하였으나, 주종관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는 육친이나 연인이 헤어져야 한다는 ‘애별리고(愛別離苦)’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이 시대에 유행한 지카마쓰의 가부키에서도 읽을 수 있다.

조루리를 극문학으로 완성시킨 지카마쓰는 1703년에 일본희곡 사상 더욱 새로운 방면을 개척하는 명작을 쓴다. 그것은 <소네자키 동반자살>이라는 작품인데, 이는 역사상의 인물이나 설화의 주인공이 아닌 시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일본 최초의 ‘시정극’이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간장가게의 점원 도쿠베와 기녀 오하쓰는 3년이 넘게 사귀어온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도쿠베는 자신을 유심히 보아온 주인에 의해 그의 조카딸과 결혼을 강요받게 되고, 오하쓰는 늙은 부자에게 팔려가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영겁의 사랑을 맺기 위해 동반자살을 선택한다.” 이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극화한 것이었는데, 봉건사회의 모순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주인에 대한 의리로 인한 애별리고의 갈등 때문에 죽음을 선택했다.

이 작품에서 조루리의 잔재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일본의 독자적 미의식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즉 작품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미치유키’가 그것이다. 미치유키(道行)란 작품 속에 허무한 상황과 주인공의 심리를 극중의 지지(地誌)나 지리(地理), 자연환경 등과 연관 지어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네자키 동반자살>의 미치유키에서는 ‘아다시가하라’는 길이 등장한다. 아다시노는 당시 화장터를 말했기에, ‘아다시가하라’라는 지명은 죽음을 향해가는 두 사람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다. 지카마쓰는 생애에 총 10권의 동반자살극을 썼는데 미치유키의 문구가 너무 아름답고 강하게 묘사되어 실제로 동반자살 사건이 점점 늘어났다. 그 결과 한참동안 동반자살극의 각색 상연이 금지 당하기도 했다.

양해와 체관의 비극
일본 연극에 있어 독자적인 특징 중 중요한 하나가 양해(諒解)와 체관(諦觀)의 비극이다. 양해와 체관의 비극이란, 말하자면 어떤 극단적인 상황이나 대의를 양해(諒解)함으로써 비극이 일어나고, 거기에는 그 상황이나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즉 거부할 수 없다는 체관(諦觀)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비극을 말한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일본 독자적이란 것인지는 서양의 연극과 비교함으로써 한층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두 남녀가 가문 간의 불화 때문에 맺어지지 못하고 죽는 비련의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과 일본의 <이모세야마 온나테이킨>을 비교해보면 그 근본적인 차이를 살펴볼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두 주인공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의지적으로 행동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로미오에게 무사히 편지가 도착하여, 로렌스 신부의 계략이 성공했다면,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죽음의 방식은 사랑하는 남녀로서 힘껏 살아간 결과로, 비극이라고는 하나 오히려 청춘을 구가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이모세야마 온나테이키>의 비극은 그 성격이 다르다. 우선 내용을 살펴보면, 판사 기요즈미와 다자이는 서로의 자식을 맺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다자이의 죽음으로 인해 불화가 생겼다. 그러자 그들의 주군인 소가노 이루카 대신은 평소 흠모해 왔던 다자이의 딸을 빼앗고자 역모를 꾀하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두 집안에 내린다.

기요즈미에게는 천왕의 비를 찾는데 아들을 출두시키라고 하고, 다자이의 미망인 사다타카에게는 딸을 자기의 측실로 들이라고 다그친다. 이미 이루카 대신의 계략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요시노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섰다. 그리고는 서로 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속마음을 넌지시 전달했다. 기요즈미는 천왕의 후궁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들이 결국은 고문당해 죽을 것이라는 것도 예견했다. 한편 사다타카 역시 딸이 이루카의 첩으로 들어가는 즉시 자결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절개를 지키고 깨끗이 죽는 편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 두 사람 사이의 암묵의 ‘양해’는 비극의 시작을 의미했다. 집에 돌아간 기요즈미는 아버지인 자신이 뒤에서 목을 쳐주겠다고 말하고, 고가스케에게 할복을 권한다. 한편 사다타가도 딸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절개를 지키라 말하고 딸의 목을 친다.

이 극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비극의 원인이 양가의 갈등이 아니라, 주종관계가 절대적인 봉건질서에 있다는 점이다. 또한 부모간의 양해와 부모자식 간의 양해가 몇 번이고 반사해서 비추게 된다. 또한 그 속에는 주군의 절대적인 명령 하에 더 이상 선택의 길이 없는 ‘체관’이 담겨져 있다. 이 극에서와 같이 가부키는 충신이나 무장이 아무리 많이 등장해도 결코 전쟁이나 충의를 찬미하거나 고취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사상 최초의 가부키 한국 공연이 실현되었다. 상연목록은 한국의 요청에 따라 <주신구라>와 <대신하는 좌선>이라는 무사세계의 극이었다. 그러자 무사도(武士道)를 고취하는 호전적인 연극을 왜 상연하느냐는 질문이 많이 나왔다. 그때 문예고문으로서 동행했던 필자가 이 극은 서민의 드라마로서 성립한 극이라는 점을 설명하느라 애를 썼다.

현세에 살아 있는 사실주의극
과거의 가부키는 가족관계의 강한 연대감을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쿠후 말기부터, 즉 1830년대부터는 사실주의극으로 전환했고 인간적인 연대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주인공이 된다. 그것은 근세 일본연극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러한 사실주의 가부키에 영향을 미친 작가는 난보쿠와 모쿠아미이다. 이 두 사람은 에도 시대의 향락지인 오카와바타(大川端)를 주로 묘사했다. 그들은 특히 스미다 강을 중심으로 상인들이 사는 곳을 일상적인 리얼리티 장면의 기조로 삼았다. 가장 큰 공통점이라면 가부키를 관통하는 부세관(浮世觀, 찰나적 향락주의)이다. 따라서 전통 가부키에서의 아라고토(정의를 상징하는 주인공)가 사라지고, 애별리고의 인물들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즉 육친 가족이나 주종, 사회와의 연대의식이 없는 고독한 무법자들이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음울한 장면묘사도 에도 말기 가부키의 특징 중 하나였다. 주인공이 도둑, 살인범, 매춘부 등의 무법자로 대체되면서, 공갈협박이나 살인, 정사 장면, 근친상간과 같은 부조리한 국면이 많이 묘사되었다. 하지만 같은 사실주의 작가라 할지라도 가와타케 모쿠아미는 난보쿠와 조금 달랐다. 그는 메이지유신이라는 대 변혁기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난보쿠의 뒤를 이었지만, 모쿠아미의 작품에는 난보쿠 작품의 주인공에게 결여되어있던 인간관계가 되살아나고, 애별리고라 할 수 있는 비극의 장면이 돌아온 것을 느낀다. 그리고 결말은 권선징악이며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가끔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로 건전했다. 물론 그의 작품에도 무법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의적으로 묘사되었다.

난보쿠와 모쿠아미를 그림으로 비교하자면, 난보쿠의 작품은 원색의 진흙물감을 두꺼운 붓에 묻혀서 한 번에 그린 지옥그림이고, 모쿠아미의 작품은 같은 지옥그림이라도 여러 가지 붓을 사용해서 완성한 일본화(日本畵)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자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각자가 활동했던 시대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난보쿠의 시대(1804~1830)는 시민문화가 난숙한 최성기(最盛期)였다. 반면 모쿠아미는 난보쿠보다 61년 후에 태어난 사람으로, 그가 작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에는 덴포의 개혁이 일어나서 풍기상의 탄압이 엄격했다. 그래서 모쿠아미는 양식미로 극의 성격을 부드럽게 하려 했던 것 같다.

난보쿠의 작품은 극히 리얼했지만 모쿠아미는 조루리에 기초한 기다유 가부키의 요소도 첨가하여 음감에 의한 가부키를 되살렸다. 즉 준악극적(準樂劇的)인 가부키 본래의 종합적 양식미의 전통을 되살려 ‘에도 가부키’를 매듭지었다. 이처럼 가부키는 지카마쓰에 의한 조루리의 드라마 성립에서부터 모쿠아미의 도둑극까지 각각의 시대를 반영해서 변화했다. 그로인해 풍부하고 다채로운 작품으로 진화할 수 있었고, 기예를 비롯한 배우의 자질이 육체적 전승에 의해서 현대에 이어짐으로써 가부키 연극은 그 독창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가부키죠_歌舞伎

Kabuki _歌舞伎

가부끼

 

 

 

 

 



교토의 미나미자에 있는 가장 오래된 가부끼座_극장입니다_

The oldest Kabuki theatre in Japan: the Minamiza in Kyoto 

 

 



도쿄 긴자에 있는 낮익은 건물_ 바로 가부끼좌 극장입니다_

The Kabukiza in Ginza is one of Tokyo's leading kabuki theaters.

 

 

 

 

오늘은 일본 연극_ 가부키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_

 

스무살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인연으로 저는 학생때 지금의 서울예술대학인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기획실장일을 겸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_ (아참_ 그무렵 배가 많이 고파_ 용산구 문배동 30번지 오리온 비스켓과에서 저녁이면 일했습니다_ 그곳에서 비스켓 싫컷 먹고_ 낮에는 남산에 가 유덕형님과 오태석과 함께 연극을 만들었습니다_) 서양연극의 페러다임에서 벗어 나고 싶어서 주로 우리 연극의 아이덴티티를 찾는 노력을 했습니다_ 마당놀이를 처음 도입했으며 태권도 춤사위는 중요한 몸짓으로 차용 되었고_ 우리 선불교의 명상도 배우훈련에 중요한 덕목이 되었습니다_ 그때 만든 연극이 세익스피어의 햄릿을_ 우리식 <하멸태자>로 만든다거나_ 몰리에르의 스카펭의 간계를_ 우리식 쇠뚝이 놀이로 번안하거나 하였습니다_

 

그당시 저에게는 아시아 연극을 공부하는 것이 참 흥미로웠는데_

중국의 경극과 함께 가장 흥미로운 것이 일본의 가부끼와 노였습니다_

그래서 오늘 자료_ 가부끼좌_를 설명하는 것은_

첫사랑 같은 즐거움이 있습니다_

 

 



가부끼 공연을 창시한 이주모의 오쿠니의 모습입니다_ 흥미로운 것은 사무라이의 카타나 옷에_ 십자가 목거리를 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_ 이 남장의 사무라이 배우는 사실 여성입니다_ 교토의 무대에 등장한 가부키의 창시자로 알려진 이즈모(出雲)의 오쿠니(阿國)는 원래 무녀(巫女)였습니다_ 이즈모의 오쿠니는 처음에는 교토의 시조가와라(四條河原) 강변에서 가설극장으로 판잣집을 짓고 공연을 하였습니다._오쿠니 연희집단은 민중으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이렇게 오쿠니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남장을 하거나 괴상한 복장을 하고 연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_ 이들을 유녀가부키라고도 했으며 연희집단을 편성해 지방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방도시에도 토착 유녀가부키패가 생겨나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_ Kabuki founder Izumo no Okuni, wearing a Katana and a Christian cross.

 

 

 

부가쿠 · 노(能) · 교겐(狂言) · 분라쿠와 함께 일본의 전통연극의 일종입니다. 부가쿠가 1000여년의 역사를 지닌 궁정귀족의 예능이고,

노와 교겐이 600년 전에 완성된 무사귀족의 예능이라면,

가부키는 분라쿠와 마찬가지로 약370년의 역사를 간직한 에도시대 도시 시민계급인 초닌(町人)의 연극입니다.

 

가부키란 원래'かぶく(傾く)'란 동사의 명사형으로,'かぶく'란 유별난 것 즉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머리 형태나 복장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가부키란 노교겐(能狂言)과 닌교조루리분라쿠라고도 함)의 요소를 흡수, 소화하여 복잡한 내용과 양식을 지니게 된 서민연극이며, 한마디로 일본 전통예능의 집대성입니다. 하지만 분라쿠와 노처럼 정연하고 형상화 · 공식화된 예술과 달리 자연스럽고 관능적인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위해서

일본문화를 이해하는데 가부끼는 참 중요합니다_

 

그러나 복잡한 역사와 형식미를 가진 가부끼를 단순히 설영하기 위해

아래 그림을 준비하였습니다_

여기에 영문으로 표시된 중요한 단어들을 설명을 올렸습니다_justinKIM

 

 

 


 

가키와리(書割)
대도구의'하리모노(張り物-나무에 종이나 천을 붙여 바위나 나무 등으로 보이게 만든 것들)' 중에서도 이타카베(
板壁-판자벽)나 아지로베이(대나무 등을 엮어서 만든 판으로 된 벽) 등과 같이 자로 치수를 재어 그리는 것을 가키와리(書割)라고 한다.

 

마와리부타이(廻り舞台-회전무대)
원형으로 잘라져 있는 무대를 회전시켜 별도의 장면으로 변환시키는 무대장치. 막을 내리지 않고 관객에게 보이면서 장면전환을 하는 연출도 있다.

 

세리(セリ)
무대에 뚫린 승강가능한 기리아나(切り穴). 등장인물의 출입이나 무대장치의 전환에 사용한다.
 

 

롯포(六方)·단마리(だんまり)·게렝(ケレン)
가부키에서 배우들이 무대에 들어설 때 손발을 내저으면서
위세있게 걷는 걸음걸이를 롯포라고 한다. 연기술로서의 뜻은 천지동서남북(天地東西南北)의 방향으로 손을 움직이는 것으로 해석된다. 앞으로 나아갈 때 왼발과 왼손, 오른발과 오른손을 같은 쪽으로 내미는 걸음걸이다. 단마리는 가부키연기의 하나로서 한자로는 '암투(闇鬪)' 또는 '암도(闇挑)'라고도 쓴다. 등장인물들이 어둠 속에서 대사없이 무언으로 서로 더듬어 찾는 동작을 과시하는 연기법을 말한다. 한편 게렝은 무대에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교묘한 기교와 수법의 뜻으로 쓰이고 가부키의 연기와 기예에도 응용하게 되었다. 몸을 공중에 뜨게하는 장치, 재빨리 변신하는 연기, 겉옷을 재빨리 벗고 속에 입은 옷을 드러내는 연기 따위를 말한다. 곡예적인 요소를 도입해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붓카에리(ぶっ返り)
어깨 위 봉긋한 부분에서 꿰매놓은 상반신 의상을 앞뒤로 나눠 하반신에 덮어 안쪽의 의상으로 바꾸는 장치. 악인이나 동식물 등 변화하는 성질을 가진 것들이 감추고 있던 본성을 나타낼 때에 사용한다.


 

 

 

 

 

 

 






마와리부타이(廻り舞台-회전무대)
원형으로 잘라져 있는 무대를 회전시켜 별도의 장면으로 변환시키는 무대장치. 막을 내리지 않고 관객에게 보이면서 장면전환을 하는 연출도 있다.

 

구마토리(取,바림)    
구마토리라는 것은 얼굴에 연지로 선을 긋는 독특한 화장법을 말한다. 처음에는 연지를 바른 얼굴 위에 분을 바르고, 그 분 위에 연지로 다시 선을 긋는 방법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분 밑에 연지가 잠겨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 단지 분을 발랐다는 것이 아니라 분 밑에 연지색이 어렴풋이 보인다는 데 미묘한 뉘앙스가 있다. 구마토리는 가부키의 고유한 양식미를 표현하는 배우의 독특한 얼굴치장 방법으로 홍색계통과 남색계통으로 크게 나뉘어진다.


역할의 본성을 과장하는 가부키(歌舞伎) 특유의 화장법. 근육의 융기를 그러데이션을 넣은 선으로 표현. 베니구마(붉은색)는 정의, 젊음, 정열 등을, 청색을 기조로 한 아이구마는 사악함을 나타내며, 갈색의 다이샤구마는 요괴의 변신에서 사용한다.

 

 

구도키
①여성역의 배우가 절절한 심정을 토로하는 대사 기술. 남성역 주연배우의 모노가타리(物語-과거를 술회 등을 주위의 인물에게 들려주는 일)와 같이 기다유부시(義太夫節) 등의 음악을 배경으로 얘기하는'이토니노루(반주에 맞춰 말하거나 노래하는 일)' 대사가 볼만한 곳이다. 후시(節-선율, 가락)로서도 뛰어나다. ②샤미센(三味線) 음악, 가부키(歌舞伎) 무용의 곡 중에서 조용하고 차분한 정서의 연주로 참한 춤을 보여주는 볼만한 부분.

 

 





 

미에(見得)
미애라는 말은 외양, 외관, 허식, 허영 등의 뜻을 갖는다. 가부키의 독특한 연기수법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무대에서 연기가 진행되는 어느 한순간에 배우가 정지 상태로 눈을 부라리거나 손이나 발에 힘을 집중시키는 연기를 말한다. 원칙상 이 순간은 무대에 출연하고 있는 등장인물들 모두가 정지 상태가 되고, 또한 미에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반주음악도 멈추고 딱딱이만 친다. 미에는 말하자면 연기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일이며 연기의 어느 순간에 초점을 모으는 연기인 것이다. 이는 관객에게 어느 동작을 인상깊게 하고자 할 때 배우가 신체의 움직임을 고정해 조각과도 같이 정지한 포즈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가부키가 회화적인 무대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런데서 비롯한다.

 

 




 

출처 : 우리와음악
글쓴이 : canad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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