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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세,바르크 음악. 중세,바르크 주요음악가 소개

음악의향기 2008. 12. 13. 08:09

중세,바르크 음악. 중세,바르크 주요음악가 소개

중세 음악가:

*팔레스트리나(G.P.Palestrina 1525-1594)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i 1554-1612)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Monteverdi(1567~1643)

*하인리히 쉬쯔Heinrich Schutz(1585~1672)

*북스테후데Buxtehude, Dietrich(1637~1707)

*퍼셀(Henry Purcell 1659-1695)

바르크 음악가:

*아르칸젤로 코렐리Arcangelo Corelli(1653~1713)

*쿠프랭(Francois Couperin 1668-1773)

*알비노니(Tomaso Albinoni 1671-1750)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1678~1741)

*게오르그 휠리프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1681~1767)

*요한 세바스찬 바하Johann Sebastian Bach(1685~1750)

*게오르그 프리들릭 헨델Georg Friedrich Handel(1685~1759)

*페르골레지(Battista Pergolesi 1710~1736)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von Gluck 1714-1787)

*바하(Carl Philip Emanuel Bach 1714-1788)

*보케리니(Luigi Boccherini 1743-1805)

*케루비니(L.Cherubini 1760-1842)

*타르타니 Ginseppe Tartini(1692~1770)

중세음악 The Middle Ages

서양음악사에서 종교음악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어떤면에서 종교적인 요소를 배제하면 서양음악의 뿌리가 흔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특히 서양음악의 본산지가 기독교 문화권임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정식으로 음악을 시작한 곳은 교회였다. 중세에는 교회에 가는 일이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자 위기의식을 느낀 성직자들은 사람들을 끌기 위해 뭔가 재미있는 꺼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래를 불렀고 곧 연극과 뮤지컬까지 하게된 것인데. 물론 모두가 성가였고 성극이었다. 때문에 중세 음악의 대표적인 형태는 '그래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라고하는 무반주 합창곡이다.
결국 종교의 활성화를 위해 시작된 음악이니 교회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또 음악 그 자체보다는 종교의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이 시대 음악의 특징이다.

{ 중세 종교음악의 기본을 이루는 주요 음악 형태 }

그레고리안 찬트

그레고리안 찬트는 라틴어로 신을 찬미하고 감사하고 기원하는 노래이다.
'그레고리안 성가'로도 불리는 그레고리안 찬트는 오늘날 남아있는 노래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성악곡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가톨릭 교회에서 불려지고 있으며. 종교적인 전례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 음악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성가이다.
대개는 그레고리오 1세 (540~604년)가 로마 교황이었을 당시 불려지던 것을 간추린 것들인데, 특별히 보존된 악보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내용은 모두 똑같은 가락으로 부르는 제창 형식인 단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반주는 없다. 또 두개의 합창으로 나뉘어 부르는 교성도 있는데 부르는 사람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도 이색적이다.

미사곡 (Missa)

미사곡은 가톨릭의 주된 예식인 미사를 위한 음악이다.
'lte, missa est'라는 구절에서 유래된 것으로, 미사곡은 기본적으로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키리에(kyrie), '저 높은 곳에 영광' 이라는 뜻의 글로리아(gloria), '우리는 유일하신 주를 믿습니다' 라는 뜻의 크레도(credo),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신이신 주여' 라는 뜻의 상투스(sanctus), '신의 어린 양' 이라는 뜻의 아뉴스 데이(agnus dei)이다.
미사곡의 본문은 성서에서 딴 것이고 따라서 라틴어로 되어있다. 보통 성당에서는 사제의 말과 낭송으로 예식이 행해졌다. 이러한 예식의 극적인 요소와 아름다움은 훌륭한 음악이 될 수 있었기에 위대한 작곡가들이 미사곡을 만들어냈고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대단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종교음악이 예배음악으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진정한 예배음악은 미사곡뿐이라는 주장도 상당히 큰 공감을 얻고있다.

칸타타 (Cantata)

소나타가 기악곡이란 뜻이듯 칸타타는 성악곡이란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칸타타는 루터파 교회의 성가를 가리킨다. 루터파에서 발달한 칸타타는 원래 기도나 성가 혹은 다른 종교적인 감정에 의해 작곡된 것으로 부활적이나 성탄절 같은 특별한 날의 예식에 행해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칸타타가 많이 작곡되어 매 일요일마다 특정한 칸타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칸타타가 발달한 것은 바흐 시대였고 루터파 교회에 국한된다.
대표적인 칸타타로 바흐의 작품이 있는데, 이는 다른 칸타타에 비해 아주 뛰어나다. 완벽하고 고상하면서도 노래를 부르면 루터의 종교 개혁이라는 엄격한 신앙 의지가 나타난다. 모든 신도가 참여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 음악은 루터파가 가톨릭에서 갈라졌던 개신교 초기 신도들의 참여와 공동의식을 중요시했던 의미가 담겨 있다. 때문에 처음 감상하려면 바흐의 칸타타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오라토리오 (Oratorio)

오라토리오 역시 넓은 의미로는 종교음악이지만, 미사나 칸타타처럼 교회 의식의 부분이 아니기 떄문에 예배음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라토리오는 아주 강한 인상을 주는 종교음악회의 연주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오라토리오의 구성은 오케스트라, 독창, 중창, 합창으로 오페라의 내용과 아주 흡사하다.성경에 나오는 얘기를 주로 다루지만. 내용을 자유롭게 변화시키기도 하고 사건이나 장면과는 별도로 갖가지 극적인 효과를 낸다. 오페라를 하되 인물은 고정된 자리에 위치하고 무대장치와 의상을 뺀 뒤에 종교적인 얘기를 한다면 그것이 오라토리오이다.
대표작으로는 헨델의 (메시아)이고 그중 '할렐루야'의 합창이 제일 유명하다.

수난곡 (Passion Music)

수난곡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주제로 한 오라토리오 형식의 대규모 성악곡이다. 수난곡의 기원은 상당히 오래이며 예술 형식으로 발달한 것은 16세기 이후 오라토리오와 함께이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최고의 걸작 수난곡으로 꼽힌다.

바로크의 음악 The Baroque Period

1. 개관

(1)지리적 문화적 배경 (2)패트론 (3)새로운 어법 (4)두개의 실제 (5)음악의 일반적 특징 (6)바소 콘티누오 (7)숫자 붙은 저음(figured bass) (8)새로운 대위법 (9)모노디(monody)

2. 바로크 성악음악

(1)오페라 (2)실내 성악 음악 (3)콘체르타토 양식 (4)성악 독창음악 (4)칸타타(cantata) (5)그외의 성악곡들 (6)루터교의 칸타타 (7)수난곡(passion)

3.바로크 전기의 기악음악

(1)리체르카레 (2)칸쪼나 (3)변주곡 (4)춤음악 (5)즉흥적 작품

4. 바로크 후기의 기악음악

(1)건반 음악 (2)합주 음악 (3)합주 소나타 (4)코렐리 (5)즉흥적 요소 (6)관현악 음악 (7)관현악 조곡 (8)협주곡 (9)토렐리

 

1. 개관

(1)지리적 문화적 배경

바로크의 음악적 사고는 이탈리아적 태도에 의해 지배된다. 바로크가 끝날 무렵이 되면 유럽의 음악은 이탈리아에 뿌리를 둔 국제적 어법으로 이루어진다. 16세기 중엽에서 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는 음악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역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반도는 이즈음 스페인, 오스트리아, 교황 국가, 그리고 여섯 개나 되는 작은 독립된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들 나라들은 서로 불신이 깊었으며 유럽의 세력 변화에 의해 서로 합했다가도 곧 갈라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몇몇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보자면 보잘 것 없이 작은 나라였지만 음악적으로 보자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플로렌스는 놀라운 혁신의 시기였던 17세기 초엽에 혁신의 주역을 맡고 있었고 로마는 꾸준히 교회 음악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한 때에는 오페라, 칸타타, 기악 음악의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었다. 베니스는 17세기 내내 지도적인 음악 도시로서 오페라의 중심지였고 그후 18세기에는 나폴리가 그 역할을 했다. 볼료나와 다른 북부 도시들은 기악 음악 발전을 목격하는 증인이 된다.

프랑스는 자신의 분명한 민족적인 어법을 발전시키고 유지해 왔으나 이탈리아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의 영향은 17세기 전반에 특히 심했다. 프랑스는 1630년대에 민족적인 음악 양식을 발전시키지만 그 발전은 앞으로 100년 가량이나 발전 없이 머뭇거리게 된다. 국민적인 양식을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87))는 플로렌스 출신으로서 13세에 귀족 부인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기 위해 프랑스로에 왔다. 그에 의해 프랑스 음악의 민족성이 지켜진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독일은 1618년에서 1648년에 이르는 30년 전쟁으로 문화적 후진국으로 전락한다. 30년 전쟁은 신구 양파의 종교적 전쟁으로 독일 전역을 황폐화시킨다. 17세기 중엽 이후 이탈리아 양식은 독일 작곡가들이 세워야할 음악의 기본 원리로 받아 들여졌다.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세대들이 놀라운 업적을 이루게 된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가장 유명하다. 바하의 예술은 대부분 이탈리아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헨델의 작품은 독일적이라기 보다는 이탈리아적이다.

영국의 경우, 엘리자베트와 야코비안의 음악적 영광은 시민전쟁(civil war)과 커먼웰스(commonsealth)로 인해 사라진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탈리아 양식이 다시 부흥해 영국의 음악은 이탈리아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된 지경에 이른다.

(2)패트론

미국 대륙이 식민지화되는 시기인 1600년부터 1750년까지 유럽은 절대 군주들에 의해 지배된다. 유럽의 대부분의 궁중은 음악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루이 14세(1643-1715 통치)의 프랑 궁중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음악의 후원자는 교황, 황제, 영국과 스페인의 왕, 이탈리아와 독일 소국들의 통치자들이었다. 베니스, 북부 독일의 작은 마을 등과 같은 도시 국가들은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 모두에 기여하였다. 물론 교회는 음악의 중요한 후원자였지만, 그 전과 비교할 때 바로크 시대에서는 덜 중요한 후원자이다. 귀족, 시민사회, 교회 등의 후원자와 더불어 사적인 모임인 아카데미(academy)가 많은 도시에서 음악의 후원자로 등장한다. 돈을 내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회는 아직 드문 편이었다. 표를 사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음악회는 런던에서 1672년에 처음 생긴다. 독일에서는 1722년, 프랑스에서는 1725년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음악회가 열린다. 그러나 이런 음악회가 보편화되는 것은 1700년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음악과 나란히 다른 예술과 학문이 발전한다. 17세기가 서구 문명이 얼마나 위대한 시기였느냐 하는 것은 당시의 저술가와 예술가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영국에는 존 돈(John Donne)과 밀튼(Milton), 스페인에는 세르반테스(Cervantes), 프랑스에는 꼬르네이유(Corneille), 라신느(Racine), 몰리에르(Moli?e) 그리고 네더란드에는 음악의 전성기는 지났으나 루벤스(Rubens), 렘브란트(Rembrandt)와 같은 위대한 화가를 배출한다. 스페인은 고립되어 있어서 음악적으로는 2류였지만, 벨라케즈(Vel?quez), 무릴로(MUrillo) 등의 최고의 화가를 낳는다. 이탈리아에서는 조각가 베르니니(Bernini), 건축가 보로미니(Borromini)가 활약했다. 베이콘(Bacon), 데카르트(Descarte), 라이프니츠(Leipniz), 갈릴레오(Galileo), 케플러(Kepler), 뉴튼(Newton) 등의 이름을 보면 이 시기가 근대의 과학, 수학, 철학 등의 기초를 쌓은 위대한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3)새로운 어법

음악은 예술 전반과 지식 전반의 변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17세기의 철학자들은 이미 낡은 사고 방식을 버리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시도한다. 이런 영향으로 음악가들은 새로운 표현적 요구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어휘를 확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철학자들이 옛 틀안에서 새로운 생각을 발전시켰듯이 음악가들도 같은 일을 했다. 게슈알도(Carlo Gesualdo, Prince of Verona, 1562-1613)는 마드리갈에서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ieli, c. 1555-1612)는 모테트에서 이런 시도를 했다. 그들은 르네상스가 물려준 음악적 장르 안에 머물면서 보다 강렬하고 변화있는 감정을 쏟아 넣기 위해 노력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음악은 진정한 의미에서 실험성을 띠고 최소한 의도와 실현 사이의 큰 간극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세기 중엽에 이르면, 화성, 음색 형식등의 새로운 원천을 발견하고 이를 견고한 어휘, 문법, 구문 안에 넣은 작업이 시작된다.

(4)두개의 실제

당시의 작곡가들과 이론가들은 지난 세기로부터 그들이 물려받은 양식의 복수성을 인정하였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는 1605년에 이 두 양식을 제1 작법(printa pratica)과 제2 작법(seconda pratica)으로 명명하였다. 처음 것은 짜를리노(Gioseffo Zarlino, 1517-90)에 의해 그 작법이 정의된 것으로서, 성악 다성음악의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고, 두번째 것은 몬테베르디에 의하면, 로레(Cipriano di Rore, 1516-65), 마렌찌오(Luca Marenzio, 1553-99)와 자신과 같은 당대의 이탈리아 자곡가들의 모험적인 양식을 가리킨다. 몬테베르디에 있어서 이러한 구분을 이루는 근거는 제1 작법에서는 가사보다 음악이 우선하며, 제2 작법에서는 가사가 음악을 지배한다는 점을 기준으로 삼았다. 새 양식에서는 옛 규칙들이 무너지고 불협화가 가사에 의해 유발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보다 자유롭게 사용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를 stile antico/stile moderno(옛/근대 양식), stylus gravis/stylus luxurians(엄격한/화려한 양식)라고 부르기도 햇다.

(5)음악의 일반적 특징

바로크(baroque)라는 용어에는 불규칙적이며 때로는 기묘한 형태로 된 이상적인 모습을 추구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일그러져 사용할 수 없는 진주를 가리키는 뜻을 어원으로 한 이 단어는 처음에는 멸시직인 뜻으로 쓰여졌으나 후에 그런 함의는 없어진다. 대개 1600년부터 1750년에 걸친 예술의 양식을 가리켜 사용되고 있다. 음악에 있어서의 바로크는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 통주저음)의 발명, 반주가 딸린 모노디와 함께 태어나, 신양식(stile moderno)으로 출발한 음악이다. 바로크 음악은 심사 숙고해서 만들어진 음악으로서 고전 양식이 사고의 비약에 힘입어 이루어진 음악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다이내미즘이 그 음악의 성격으로 나타나, 변화와 풍부함을 추구하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매너리즘과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음악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바로크 양식은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허영심에 의해서 지나칠 정도로 추구된 장식법이나 묘기에 대한 선호가 배경이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바로크는 비현실적이고, 상궤를 벗어나 있으며, 대조성이 강조된 세계, 예를 들어 음크기의 대조인 포르데(f )와 피아노(p )의 대비를 창조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된다.

또 하나의 바로크 음악의 공통된 특징은 음악을 사용하여 생각과 감정을 생생하고 격렬하게 표현 또는 재현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분노, 흥분, 장엄, 영웅심, 명상, 신비, 기이함 등의 감정 등을 표현하려 노력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적 효과를 강렬한 대조를 통해 강조하였다. 바로크의 건축, 조각, 회화에서 때로 그 대상들이 과도하게 왜곡되는 것은 바로 대상 자체의 자연적 한계를 넘어 예술가의 격정적인 심정을 표현하기 위한 때문이었다.

이렇게 표현된 감정은 개인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일반화된 감정이었다. 그것은 음악적 모형 또는 착상이라고 불리 수 있는 것들을 모아 놓은 공통된 창고에서 체계적으로 규제된 어법에 의해 전달되었다. 바로크의 수사법(rhetorics)은 음악 역시 서론, 본론, 꾸밈, 강조, 결말 등의 순서를 따라 만들어진고 보았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 이론서들은 음악의 전개 방법을 수사학에서 사용되는 모형과 기법에 비유하였고 수사학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몬테베르디에서 바하에 이르는 바로크 작곡가들은 가사의 어떤 구절의 뜻을 강조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일정한 선율, 리듬, 화성, 성부짜임새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음악적 어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언어였다. 우리가 바로크 음악을 대할 때에 생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오페라, 오라토리, 간타타는 바로크 시대에 탄생하고 발달했다. 또한 바로크 시대는 기악 음악의 발전이 그 기초를 닦은 시기로서 콘체르토, 소나타, 건반악기(특히 오르간)를 위한 여러 작품이 생겨났다. 이들 악곡에는 그 용도에 따라 크게 나누어 세 그룹을 이룬다. 즉 교회(Chiesa)를 위한 음악, 실내(Camera)를 위한 음악, 그리고 극장(Teatro)을 위한 음악이다.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와 실내 소나타(sonata da camera)의 차이는 후자가 오페라와 같은 극음악과 내용적으로 가깝고 춤곡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크 음악의 특징은 3개의 성부로 음악을 만든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바의 견고한 베이스 위에 유려한 선율이라는 개념에 맞기 때문이다. 두 개의 선율 성부(목소리 또는 악기)가 세 번재 성부인 통주저음(basso continuo)에 의해 받쳐진다. 통주 저음은 스스로 화음을 낼 수 있는 악기(하프시코드 또는 오른간)과 저음만을 내는 악기(저음 현악기, 첼로 또는 바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하프시코드와 첼로는 동일한 저음을 연주한다. 통주 저음의 보편화는 화음의 진행에 대한 감각 즉, 조성적 감각을 확대시켜 조성을 확립시키고 조성 안에서의 화음의 의미를 학실히 하게 된다.

반주가 딸린 모노디(monody)와 오페라가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달되었다는 점에서, 음악에 있어서의 바로크 양식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17세기에 통주저음을 기반으로 한 음악작법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먼저 피렌체의 카메라타에 속하는 음악가들에 이어 몬테베르디, 로마 악파(L. 롯시, 카리시미, 체스티)나 베네치아 악파(F. 카발리, G. 레그렌치) 등이 나타났다. 쉿츠에서 헨델에 이르는 독일의 음악가들, 그리고 영국에 있어서의 17세기 최대의 작곡가인 헨리 퍼셀 등도 모두 오페라나 칸타타, 오라토리오와 같이 전형적인 이탈리아 풍의 극음악으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이탈리아에서는 스트라델라, 코렐리, 토렐리, 그리고 비발디 등의 노력으로 소나타 독주와 트리오 소나타를 비롯하여 콘체르토와 신포니아 등의 기악 작품이 꽃피게 된다. 그리고 그 전통은 J. S. 바하를 거쳐, 그의 아들인 칼 필립 에마누엘 바하(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88)와 하이든(1732-1809)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바로크 음악의 발전을 말하기 어렵다. 바소 콘티누오는 1640년 경 뒤 늦게 프랑스에 소개되었으며 프랑스의 음악은 르네상스의 악기인 루트가 패권을 잡고 있었다. 당시 형성되고 있던 기악곡은 궁중 발레(ballet de cour)를 기원으로 하여 여러가지의 춤곡 리듬을 사용하였으며 류트 연주자의 레퍼토리에서 악상을 얻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프랑스 춤곡 풍의 모음곡이 이루어지게 된다. 륄리는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적 여러 요소에 전부터 내려오던 프랑스적 여러 요소를 합쳐서 르레상스 시대에서 거의 빠져 나오지 않았던 프랑스 음악을 바로크적 세계를 거의 거치지 않고 직접 이른바 고전주의적 양식으로 이끌어 주었다.

(6)바소 콘티누오

17세기 이탈이아의 오페라 기보에서 활용되기 시작하여 그후 18세기 중반까지 사용된 기보 방법이다. 1775년경에 이르러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바소 콘티누오의 전성기는 바로크 음악의 전성기와 일치한다. 바소 콘티누오의 기보법은 기악 합주와 합창에서 베이스 만을 기록함으로서 내성부의 화음을 기록하지 않는 방법에서 시작되었다(베이스 밑의 숫자 유무와는 관계가 없다). 이 베이스에 기초하여 화음을 채우는 악기는 오르간, 쳄발로, 루트 등의 다성을 낼수 있는 악기였다. 베이스는 그 소리를 강화하기 위해 비올라 다 감바, 첼로, 바순등 독주 악기에 의해 중복 연주된다. 베이스에 숫자를 표시하는 것은 "숫자 붙은 저음"(figured bass)이라고 하여 그 위에 쌓여질 화음의 성격을 표시하는 방법이며 바소 콘티누오 기보법을 친절하게 구체화한 것이다. 바로크 음악의 이상이 견고한 베이스에 유려한 선율이므로 최상성의 멜로디는 물론 구체적으로 기보되어 있었다.

바소 콘티누오는 화음만을 바쳐주는 단순한 베이스인 경우도 있고 상성부와 어울리는 선율일 수도 있다. 당시 바소 콘티누오의 존재는 당연한 것으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하이든의 초기 교향곡은 고전주의 음악에 속하지만 느린 악장에서 화성을 완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쳄발로를 연주에 참가시키는 것이 바람직했다. 바소콘티누오가 사라지는 것은 피아노가 출현하여 쳄발로 또는 하프시코드가 연주의 실제에서 사라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7)숫자 붙은 저음(figured bass)

숫자붙은 저음은 낮은 음자리 표에 기보된 저음 성부(base line)에 숫자를 기입함으로서 그 저음 위에 배치될 화음을 결정하는 기보법이다. 화음을 적는 약식 기보법인 이 방법은 베니스의 성 마크(St. Mark) 성당의 연주 실제에 기인한다. 동방의 사원 모습을 닮은 이 성당의 내부는 정사각형의 모습이었고 2층 발코니의 네모서리에 합창단이 배치되었다. 둘 또는 그 이상의 합창단이 사용됨으로서 발코니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스테레오의 음향 효과를 내었다. 이를 다합창(polychoral) 양식이라고 한다. 다합창은 오르간 반주자에게 여러 합창단의 악보를 전부 그려 줄 수 없기 때문에 합창의 최저음의 한 성부의 진행만을 그려주게 된다. 반주자는 어느 합창단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음만을 보며 화음을 선택하여 반주를 해야 했다. 차츰 반주자의 편의를 위해 화음의 성격을 나타내는 숫자가 붙기 시작했고 이 기보법을 숫자 붙은 저음(figured bass)라고 부르게 되었다. 반주자는 지정된 화음을 바르게 연주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이 알맞는 장식음을 넣어 곡의 진행을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 이를 화음의 실현이라는 의미에서 realization이라고 부른다. realization은 이후 200년 이상 화성법을 교육하는 방식이 되었다.

(8)새로운 대위법

바로크 시대의 지속 저음과 숫자 붙은 저음으로 화성을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17세기의 음악은 16세기 이전에 쓰여진 대위법을 완전히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지속 저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 전까지 사용된 모든 작곡 방법에서 과격하게 이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속 저음만이 당시의 유일한 양식은 아니었다. 많은 기악합주곡들, 그리고 건반과 루우트 독주곡은 지속음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속음이 사용된 합주곡에서도 대위법이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의 대위법은 르네상스 시대의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선율의 철저한 모방을 목표로 하는 대위법이 아니라 지속 저음이 지정하는 화성적 뼈대 안에서 서로 유사하다고 느낄 수 있는 모방이면 만족하는 대위법이었다. 다시말해 철저한 모방이 아니라 화성의 틀에 맞는 모방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화성으로 지배되는 대위법으로서 그 선율들은 화성의 구조에 종속되었다.

대위법이 화성적 구조 안으로 들어오게 됨으로서 18세기와 19세기의 음악은 장조 단조의 체계안으로 정리된다. 한 곡 안에 있는 모든 화성들은 그 조의 으뜸음 위에 놓인 3화음과 연관되어 조직되며, 딸림음과 버금딸림음 위에 놓인 3화음에 의해 뒷받침되며, 그 외의 다른 화음들은 이차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리고 전조는 주조의 지배력을 희생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락된다. 우리는 여기서 지속 저음의 중요성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선율 성부를 기보하는 방법에서 이와는 다른 기보법인 화성의 진행을 강조하여 이를 기보하는 방법으로 넘어감에 있어서, 지속 저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음은 음악이 대위적 음악에서 화성음악으로, 선율적 구조에서 화성적 구조로 옮겨가는 다리였다. 18세기 중엽 이후 화성 관계가 견고하게 확립되어 지속 저음의 방법으로 화성진행을 보장할 필요가 없어지자, 지속 저음의 관습은 서서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9)모노디(monody)

음악과 극을 결합하려는 다각적인 실험이 16세기에 시도되었다. 그러나 오페라다운 오페라의 제작은 극적인 표현에 적당한 독창 양식인 모노디가 만들어지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모노디는 그리스 말로서 당시 르네상스 인들이 그리이스 고전에 대해 갖는 존경심의 결과였다. 그들은 이 노래를 고대 그리스의 독창 노래를 재발견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했다. 모노디는 성악의 선율선에 관심이 주어진 음악으로서 가사의 언어적 억양을 자연스럽게 강조한 것이다. 반주는 몇개의 간단한 그리고 뚜렷한 모습의 화음(chord)로 처리되었다. 모노디 중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으로서는 1590년대에 카치니가 쓴 Le nouve musiche(1602 출판)에 담긴 몇개의 노래들이다.

모노디는 17세기의 세속/종교 음악의 모든 분야에 깊이 침투된다. 모노디는 음악을 통하여 대화의 내용과 극의 전개를 명확하고 신속하게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라는 형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 최초의 오페라 상연에대한 논란은 있으나 1597년에, 페리(Peri, 1561-1621)와 카치니가 함께 협동하여 리투치니(Ottavio Rinuccini, 1562-1621)의 목가적, 신비적인 대본인 Euridice(에우리디체)에 음악을 붙였으며, 이 오페라는 플로렌스에서 공개적으로 상연되었다. 현재 이 오페라를 최초의 오페라로 인정한다. 그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서 현재에도 상연되는 오페로서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의 Orfeo(오르페오)로서 1607년에 상연되었다.

오페라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차츰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로마 교회는 루터파의 종교개혁의 힘에 대항하기 위해 반종교개혁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동양과 남미 등에 파견된 제수이트(Jesuit) 교단은 바로 그러한 운동의 중심체였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의 내용을 교회적인 것으로 그리고 무대 장치와 연기를 검소하게 바꾼 것으로서 교회가 민중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라토리오의 전통은 이후 계속되어 19세기에 까지 이른다.

2. 바로크 성악음악

(1)오페라

몬테베르디의 첫 오페라 오르페오는 1607년에 만투아 에서 상연된다. 이야기는 플로렌스 악파의 에우리디체와 같지만, 그 형식은 완전한 5막의 길이로 확장되었다. 음악도 역시 플로렌스 악파의 극음악 양식(stile rappresentativo)을 그 출발점으로 했으나 감정의 표현은 보다 강렬하고 다양하였다. 그 화성은 좀더 풍부한 표현력을 지녔다. 레씨타티브도 가사에만 의존하는 안이함을 벗어나 뚜렷한 음악적 형식을 갖추게 된다. 또한 독창, 이중창, 마드리갈 형의 중창, 춤곡을 도입하여 이런 부분들이 작품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높였고, 이 부분들의 선율성이 레씨타티브의 낭독성과 강한 대조를 이루게 하였다. 그는 아리아 선율 밑에 따로 오선을 그려 자기가 원하는 장식음을 써 주었으며 가사는, 같은 멜로디가 반복될 때에도 아리아의 절마다 다른 장식음을 써넣어 주었다.

오르페오에서 몬테베르디의 관현악 처리는 각별한 관심을 자아낸다. 플로렌스의 오페라는 반주 악기로서 몇개의 루우트 또는 이와 비슷한 악기들만 사용할 뿐이었다. 모노디라는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이 악기들은 무대 장치 뒤에 자리잡아 눈에 띠지 않게 하였다. 반면, 몬테베르디의 관현악은 약 40개의 악기로 구성었으며 무대 앞에 위치하였다. 그의 관현악에는 풀루트, 코르네트, 트럼펫, 트롬본, 그리고 각종 현악기들과 여러개의 지속음 악기들이 포함되었다. 오르페오의 대규모 관현악단은 그가 발명한 것이 아니다. 옛 신비극이나 인터메디오(막간극)에 사용되었던 전통적인 대규모 연주 집단을 조직화한 작곡가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력은 그 자신의 후기 작품과 17세기의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 계승되지 못했다. 오르페오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오페라의 관현악은 현악기군과 하프시코드만으로 구성되었다.

오르페오 이후 중요한 오페라 악파가 1630년대의 로마악파였던 것으로 보아 오르페오 이후 20년 동안 오페라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로마에서는 주로 종교적인 이야기가 주제로 다루어졌으며 중창들이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하였다. 초기 로마 오페라로서 란디(Stefano Landi, c.1590-c.1665)가 작곡한 "성 알레시오"(St. Alessio, 1632)가 중요하며, 줄거리는 15세기경의 성자 알렉시스의 생애에 관한 것이다. 로마에서 우리는 독창 노래가 레시타티브와 아리아라는 두가지 뚜렷한 형태로 분리됨을 본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의 모노디적 노래에는 선율적 요소가 많지 않았으나 란디와 로마의 경우, 본래 선율적 요소를 조금 지니고 있던 레시타티브들은 건조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같은 음을 여러번 반복하게 되어 음악적 굴곡이 없어져 하나의 화음 위에 얹히는 낭독이 된다. 후기 로마 악파 중 중요한 사람은 로시(Luigi Rossi, 1579-1653)였다. 그의 오르페오(1647년 파리 초연)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와 같은 줄거리를 다루고 있지만, 고대 신화와는 관계없는 사건과 등장인물, 장대한 효과, 어울리지 않는 희극적 장면등으로 이야기의 진지함을 파괴하고 있다. 겉으로는 진지한 극이라고 말하면서, 희극적이고 기괴하고 감각만을 자극하는 요소들이 끼어드는 것은 17세기 대부분의 이탈리아 대본 작가들의 흔한 관습이었다. 이는 초기 플로렌스 악파와 몬테베르디에서 처럼 극의 통일성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신화들을, 작곡가와 가수들에게 충분한 여흥을 약속해주는 편리한 재료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대본의 타락은 극장 음악의 양식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로시의 오르페오는 그 효과에 있어서 아름다운 아리아와 중창들이 치밀한 계산하에 연결되어 있어서 청중들로 하여금 극으로서의 결함을 잊게 해준다.

오페라 대본의 타락과 음악의 변화는 오페라 공연의 개방성 때문이기도 했다. 1648년 베니스에 처음으로 공공 오페라 극장이 개관되었다. 몇해 지나지 않아 베니스는 이탈리아에 있어서 오페라의 중심 도시가 되었으며, 베니스는 17세기가 끝날 때까지 이 위치를 유지한다. 베스의 오페라 좌의 청중은 상당수가 곤돌라 뱃사공이었을 만큼 오페라는 대중화되었다. 몬테베르디는 그의 마지막 두 오페라를 베니스를 위해 썼다. Il ritorno d'Ulisse(율리시스의 귀환, 1641상연)와 L'incoronazione di Poppea(포페아의 대관식, 1642)은 여러가지 점에서 그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오르페오 보다는 관현악 색채가 화려하지 못하고, 관현악 편성이나 무대 장치가 장대하기 못하지만, 음악을 통해 인간의 성격과 열정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오르페오를 능가하며, 이점에서 17세기의 다른 어떤 오페라 보다도 월등하다.

베니스 오페라 작곡가 중에서 지도적인 인물 중 하나는 몬테베르디의 제자인 카발리(Francesco Cavalli, 1602-76)이다. 베니스의 오페라 극장이 얼마나 많은 작품을 끊임 없이 요구했는지는 카발리의 제작량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는 41개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Giasone(1649)로서 이 작품은 아리아와 레시타티브가 뚜렷이 구분되며 그 둘이 교대 되어 이루어지는 양식으로 되어 있다.

체스티(Antonid Cesti, 1623-69)의 오페라는 카발리의 것보다는 좀 세련되었지만, 강렬하지는 못하다는 평을 받는다. 그의 오페라에는 서정적인 아리아와 이중창에 좋은 음악이 많이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는 Il pomo d'oro(황금 사과)로서 레오폴드 I 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1667년에 비엔나에서 상연되었다. 축제 오페라였기 때문에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제작되었다. 베니스에서는 통하지 않던 규모와 사치스러운 무대를 시도했다. 정교한 기계 조작을 사용한 해상 전투, 육상 전투, 폭풍, 선박의 난파, 하늘에서 신이 내려오는 장면 등 그박의 온갖 스펙타클을 재현하는 것이 베니스에서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황금사과에서는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무대가 시도되었다.

17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앞으로의 2백년 동안 커다란 변화를 가져 오지 않는 틀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1)독창 노래에 중점을 두고 중창과 기악 음악은 비교적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이 전통을 오래 계속된다. (2)레시타티브와 아리아가 분리된다는 점과, (3)아리아에 분명한 모형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초기 오페라가 발생할 당시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초기의 플로렌스 악파는 음악이 시에 부수되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베니스 악파는 대본을 음악 구조의 발판을 이루는 편리한 수단으로 생각했을 따름이다. 시가 음악에 부수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2)실내 성악 음악

17세기 초에 작곡가들은 두개의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 하나는 모노디와 관련된다. 독창 레시타티브라고 할 수 있는 모노디의 융통성 있는 리듬과 극적인 힘을 대위법적 성악음악 즉, 여러성부가 똑같이 중요한 음악의 진행에 어떻게 흡수시키느냐 하는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지속 저음과 관련된다. 베이스만으로 받쳐 주는 하나 또는 둘의 상성부가 옛 대위법 음악 만큼 풍부한 음향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하는 문제다. 이 문제들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초기의 프플로렌스 악파가 취했던 태도로서 대위법을 완전히 무시하여 단선율에만 집착한 모노디를 만드는 것이었다. 또는 모노디를 무시해 버리고 옛 대위법 방법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음악의 장래는 그 두가지 극단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 초에 작곡가들이 해결한 방법은 그 두개의 융화를 찾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모노디가 차츰 풍부해지고 형식적으로 안정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많은 방법 중 두가지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1)전체화성 구조와 함께 베이스를 사용하여 작품의 형식적인 일관성을 부여하는 방법과 (2)concertato 원칙을 사용하여 짜임새의 다양성과 대위법적 흥미를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바소콘티누오와 콘체르타토 방식은 개관에서 간단히 설명하였으나 좀 더 상세히 알아 보기로 한다.

17세기 초에 출판된 모노디 음악의 모음집을 살펴보면 곡의 통일성을 얻기 위해 가사의 각 절(stroph)에 같은 베이스를 붙이고 독창의 선율부는 그 베이스 모형이 반복될 때 마다 변화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방식을 strophic variation(장절식 변주)라고 부른다. 베이스는 반복될 때마다 그 모양이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그 윤곽은 유지되어 화음의 연속은 같게 유지되었다. 장절식 변주로 된 노래의 베이스는 자유롭게 창안될 수 있었느데, 이 경우 선율이라기 보다는 화성을 위한 베이스 선(line)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베이스 모형, 즉 ground 라고 불리는 기존의 베이스 선을 상용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ground는 아주 짧고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윤곽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이스선이 시의 한 절에 맞추기에 너무 짧를 경우, 여러번 반복되었는데, 그 때 변형되지 않고 반복될 경우, 이를 ostinato bass라고 부른다. 또는 베이스 라인이 반복되면서 이조되거나 몇몇 기초적인 음을 제외하고는 리듬이나 선율적 장식으로 변형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반복괴는 베이스 모형중 몇 개는 많은 바로크 시대의 성악곡과 기악곡을 비슷한 모형을 갖게 하였다. 로마네스까 베이스(romanesca bass)는 17세기 변주곡의 주제로 사랑받던 것으로서 이를 사용한 실제 예로 헨리 퍼셀의 곡을 들 수 있다. 이 곡의 로마네스까 베이스는 다음과 같다.

악보

샤콘느(chaconne, Spanish:chacona, Italian:ciaona)와 파사칼리아(passacaglia, Spanish:passecalle, French:pssecaille)의 짧은 베이스 패턴은 시형식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chacona는 후렴과는 달리, 춤반주의 노래로서 기타 코드의 단순한 패턴을 따랐던 것으로서 남미에서 스페인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파가칼리아도 스페인에서 연유된 것이다. 파사칼리아는 노래의 한절 끝이나 절과 절 사이에 연주되던 기타 코드의 패턴으로된 후렴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패턴들은 가악 또는 성악의 변주곡을 바쳐주기에 알맞는 보통 3박자의 단조로 된 베이스 유형으로 정리된다. 17세기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샤콘느와 파사칼리아의 베이스선의 특징은 느린 템포의 3박자로서 네마디 단위가 반복되는 것이다.

(3)콘체르타토 양식

17세기 초의 두드러진 발전으로 콘체르타코 양식의 발생을 들 수 있다. concertato는 형용사로서 concert, concerto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같이 울린다"는 어감을 갖기도 하지만 이탈리아어의 동사인 concertare(확실하게 하다. 합일점에 이르다)와 공통된 의미를 갖는다. 한편 경쟁, 대항의 뜻을 갖는 라티어의 concertare와 비슷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콘체르타토 양식에는 여러가지 음악적 요소가 사용되며, 그것들이 대위법이나 모노디 처럼 통일된 배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한 성부(또는 악기)/다른 성부(또는 악기), 한 그룹/다른 그룹, 한 그룹/독창자(또는 독주자)의 대조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가능한 모든 요소적 차이를 이용해 서로 그 요소을 바탕으로 대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통일된 배치라고 한다면, 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에 대해 대조적인 양상을 들어내고 강조하는 양식이 콘체르타토이다. 그것이 악기 차이이건 소프라노/알토의 차이이건 관계 없이 모든 대립적 요소를 표면화 시켜 강조하는 것이다. 바로크의 콘체르타토 양식의 기원을 우리는 베니스의 다수합창(polychoral) 작품, 그리고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많은 다성 마드리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양식의 발생과 발전은 1605, 1614, 1621, 1638년에 각각 출판된 몬테베르디의 제5, 6, 7, 8의 마드리갈 모음집에서 알아 볼 수 있다. 이 위대한 작곡가는 17세기의 잡다한 음악적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 단단한 구조, 다양한 음색, 가사 내용에 맞는 기쁨/슬픔, 씩씩함/부드러움, 전쟁/평화를 교채시키는 유려한 어법을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4)성악 독창음악

17세기 초부터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은 수천 곡의 모노디를 생산했다. 독창 마드리갈, 장절식 아리아들, 칸쪼나가 그것이다. 당시 오페라가 제한된 청중을 위해 드물게 연주된 것에 비하자면, 이들 곡들은 오페라 보다 훨씬 널리 알려져 애창되었다. 모노디와 소규모 앙상블을 위한 성악곡들은 여러 곳에서 연주되었고 수 많은 악보집이 출판되었다. 최초의 중요한 모노디 모음집은 카치니(Guilio Caccini c. 1550-1610)의 nouve musische(새 음악)이었다. 초기의 또 다른 중요한 작곡가로는 딘디아(Sigmundo d'Inia, ca. 1582-before 1629)로서 독창 노래들과 다성마드리갈, 모테트 등을 작곡하였으며 17세기 초의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4)성악 독창음악

이탈리아의 칸타타는 17세기 초 모노디적인 장절식 변주곡에서 자라나기 시작해서 여러개의 대조적인 짧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장르로 발전한다. 칸타타에 대칭되는 소나타라는 말처럼 처음에는 여러 형의 작품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칸타타(cantata, 직역하면 '노래되는' 작품)는 서정적이거나 극적인 요소를 조금 갖는 가사에 붙인 레시타티부와 아리아가 두번 내지 세번 교대로 나타나는 여러 악장으로 이루어진 독창과 지속음 반주로 이루어진 곡을 지칭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칸타타는 여러 부분으로 되어 있고, 아리아와 레시타티브가 교대로 나타나며, 독창과 지속음 반주로 이루어진 성악곡을 가리킨다. 가사는 보통 연가적인 것으로서, 극적 대사 또는 독백의 형식을 취한다. 칸타타는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똑 같이 오페라에서 떨어져 나온 한 장면을 연상케하는 음악이다. 물론 오페라의 경우보다는 시나 음악에 있어서 친밀감이 강하다. 무대 장치, 의상, 조명등이 없이 선별된 청중만이 듣는 실재 연주를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칸타타는 오초페라 좌에서는 상실될 수 있는 섬세하고 우아한 정교함을 갖춘 것이 장점이다. 따라서 오페라와는 달리, 작곡가들은 실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루이지 로시(Luigi Rossi,1598-1653), 카리시미(Giacomo Carissimi, 1605-74), 체스티( Pietro Cesti, 1623-69), 레그렌치(Giovanni Legrenzi, 1626-90), 스트라델라(Allessandro Stradella, 1644-82), 알렛산드로 스칼라티(Alessnadro Scarlatti, 1660-1725)에의해 많은 칸타타가 작곡되었다.

(5)그외의 성악곡들

17세기의 칸타타는 소프라노 독창과 콘티누오로 쓰여졌지만, 합주 악기의 반주와 리코르넬로로 이루어진 성악곡도 있었다. 많은 곡들은 두성부 이상을 위한 것이었다. 실내 이충창 곡들은 숫자저음 위에 두개의 동등하게 취급된 성악선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마치 기악의 트리오 소나타에 대칭되는 바의 것으로서 당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스테파니(Aostino Stefanni, 1654-1728)가 이 분야에 명성이 있었고 후에 바하, 헨델 등의 작곡가들이 그의 곡을 를 귀감으로 삼았다.

세레나타(serenata)는 칸타타와 오페라 사이의 중간형태로서 소규모의 반주와 서너명의 가수가 연주하는 특별한 날 연주하는 절반 드라마적인 작품이다. 스트라델라가 세레나타를 처음 썼으며, 그후 스칼라티, 헨델, 그후 17,8세기의 작곡가들이 이어진다.

(6)루터교의 칸타타

1700년 함부르크의 노이마이스터(Edmund Neumeister, 1671-1556)는 정통파 신학자였으나 실네로는 경건파의 시인이었던 그는 이탈리아의 칸타타 형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성악을 위한 위한 새로운 가사를 제시하였다. 17세기를 통털어 루터 교회의 성악곡의 가사는 성경과 예절 기도문과 코랄에 연유된 것이었다. 노이마이스터는 여기에다 그날 읽은 성경 구절에 연유한 그리고 이에 대한 개인적인 명상에 기초한 시를 덧붙였다. 이들 시는 아리아나 아리오소로 작곡되었다. 후에는 이들 시는 레시타티브를 앞에 둔 다카포 형식의 노래가 된다. 노이마이스터와 추종자들은 시를, 행의 길이가 같지 않고, 각운이 불규칙한 소위 마드리갈적 풍으로 써서 작곡가들의 음악적 상상력을 부추겼다. 바하의 마테 수난곡에 나오는 칸타타의 가사는 바로 이런 형식이다. 노이마이스터와 후대의 루터교 시인들은 칸타타 가사를 연시(cycle)로 써서 교회력에 마추려고 했었다.

이 새로운 형의 칸타타는 정통파와 경건파 모두에 받아들여지고, 그 시에는 객관적/주관적, 그리고 형식적/감정적 요소들이 들어가게 된다. 칸타타의 음악적 틀은 과거의 모든 전통을 흡수하게 된다. 코랄, 독창노래, 연주의 모든 방식들이 섞이고 오페라의 레시타티브와 아리아라는 강력한 극적 요소가 더해 진다.

J. S. 바하는 교회 칸타타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지만 그에 앞서 공헌한 작곡가들이 있다. 오페라 작곡가였던 크리거(Johann Phillipp Krieger(1649-1725), 라이프치히에서 바하가 오기 전에 직책을 맡았던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 할레(Halle)의 짜코프(Friedrich Wilhelm Zachow, 1663-1712)등이 있었다. 특히 짜코프의 칸타타는 형식의 변화가 많았다. 레시타티브와 다 카포 아리아가 합창과 잘 섞여 있으며 때로 코랄 멜로디를 상용했다. 그의 작품은 바하의 칸타타를 예견케 한다.

칸타타는 바하의 동시대 작곡가인 다름슈타트(Darumstdt)의 그라우프너(Christopher Graupner, 1683-1760), 함부르그의 요한 마테손(Johann Mattheson, 1681-1764)등의 교회 작품의 중요한 생산품이었다. 이들은 수난곡과 오라토리오를 썼다.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 1681-1767)은 라이프치히, 아이제나하(Eisenach), 프란크푸르트, 함부르그 등에서 활동했다.

텔레만와 헨델은 바하의 생존시 가장 뛰어난 작곡가의 대접을 받았다. 텔레만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 이유는 그의 작품이 출판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출판된 작품 중에는 네 개의 년간 작곡된 작품 전집(1725-26, 1731-32, 1744, 1748)이 있었다. 그는 다작가로서 그가 쓴 곳들은 30개의 오페라, 12개의 칸타타 연곡집(천 곡이 넘는 칸타타), 46개의 수난곡, 많은 오라토리오, 그 외의 교회작품들과 서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이 수백곡에 이른다. 샤이베(Scheibe Johann Adolph, 1708-1776)는 바하의 음악에는 지나친 계략이 들어가 있으며 내성부가 너무 과도하게 꾸며져 있다고 비난했으나 텔레만의 음악은 가락이 자연스럽고 화성이 직법적이며, 단순한 반주이면서도 더욱 자연스럽고 매력적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7)수난곡(passion)

북부 독일의 루터교 지역에서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같은 성경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든 히스토리아(historia)가 오라토리오 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히스토리아 중 가장 중요한 유형이 수난곡이다. 성경을 토대로 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다룬 평성가(plainsong, 그레고리안 성가의 다른 말)는 중세부터 끊이지 않고 존재해 왔다. 12세기 이후 이 이이야기가 절반낭독조로 암송되는 것이 관습이었다. 한 사제는 설명 부분을 노래하고 다른 사제는 그리스도의 말을 그리고 세번째 사제는 군중(turba)의 말을 음역과 템포의 대조를 적절히 주어 노래하였다. 15세기 이후 작곡가들은 독창 성부와 대조를 이루기 위해 군중의 말을 모테트 양식의 다성음악으로 만들었다. 이런 유형의 작품을 극적 수난곡(dramatic passion) 또는 장면적 수난곡(scenic passion)이라고 한다. 1550년 발터(Johann Walter, 1496-1570)는 루터 교의 사용을 위해 마테 수난기를 처음으로 가사을 독일로 바꾸었으며 쉿츠(Heinrich Schuz, 1585-1672)를 비롯한 많은 루터교 작곡가들이 여기에 곡을 붙였다. 가사 전부를 일련의 다성적 모테트로 작곡한 모테트 수난곡(motet passion)은 15세기 중엽부터 많은 카톨릭 작곡가들도 작곡하였다. 가장 뛰어난 루터교의 모테트 수난곡으로는 1568년의 버크(Joachim a Burck, 1546-1610), 1594년의 레흐터(Leonhard Lechner, c.1553-1606), 1631년의 데마티우스(Christoph Demant1567-1643)의 곡이 있다.

17세기말 음악회가 성행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수난곡이 나타나게 되며 그 형식은 오라토리오의 형식을 모방한 것이다. 오라토리오 수난곡(oratorio passion)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이 형식은, 레시타티브와 아리아 아상블, 합창, 기악 연주 등 이 모든 것이 오페라라고 할만큼의 극적인 면을 만들어 나간다. 쉿츠는 그의 Seven Last Words(마지막 말씀)에서 이런 종류의 음악적 접근을 시도한다. 물론 그의 가사는 한 셩격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네 개의 성격에서 인용해 혼합한 것이기는 하다.

성경 이야기에 대한 시적 명상이 수난곡의 적절한 부분에 삽입되어 소프라노에 의해 때로는 레시타티브를 앞에 두고 노래된다. 또한 이야기가 진행되는 적절한 곳에서 합창단이나 예배를 보는 회중들이 수난기와 관련이 있는 코랄를 부르게 된다. 수난기를 음악으로 잘 만든 것으로 요한 세바스티안(Johann Sebastiani, 1622-1683)과 요한 타일레(Johann Theile, 1646-1724)의 것이 있다. 그후 경건파의 영향으로 새로운 형태의 수난기 대본이 1706년 훈놀트(Christian Friedrich Hunokd)에 의해 "Der blutige und sterbene Jesus"(피흘리며 숨져가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작사가는 성경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석하여 당시 유행에 맞게 조잡한 사실주의적 묘사로 그리고 참기힘든 상징적으로 해석을 첨가하였다. 카이저(Keiser), 텔레만(Telemann), 헨델(Handel), 마테존(Mattheson)과 18세기의 열다섯명이나 되는 다른 작곡가들이 음악을 붙인 브로케스(Barthold H. Brockes)의 인기 있던 수난기 대본(1712)도 같은 맥락에 속하는 작품이었다. J. S. 바하도 그 대본에서 아리아 가사를 따다가 요한 수난곡에 사용하였다.

3.바로크 전기의 기악음악

17세 기 초의 성악 음악은 모노디라는 새로운 기법을 수용하여 16세기 양식에 대한 기본적인 변화를 수행해야 하였다. 그러나 기악 음악은 대체적으로 보아 르네상스가 끝나기 이전에 나타났던 길을 따라 계속 전진한다. 기악 음악에 모노디가 적용된 것은 독주 바이올린과 지속음 소나타에서 보듯이 가사 때문에 골머리를 않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속 저음은 기악 합주에 쉽게 채택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로크 시대를 일관하여 비록 그 수는 적지만, 지속음을 전혀 사용치 않거나, 이따금씩 밖에 는 받아들이지 않는 모방 대위법에 의한 합주곡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그런가하면 독주 건반 악기와 루우트 음악에서는 지속저음의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17제 기 전반의 기악음악은 그 양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차츰 성악 음악과 동등하게 된다. 바로크 새대 끝머리에 이르러 확립되는 여러 형식들은 초기에는 표준적인 형식이 없었으며 형식간의 차이도 명료히 구별되지 않았다. 17세기 초에 나타나는 기악형식의 모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ricerare 형의 곡들: 연속적인, 다시 말해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모방 대위법에 의한 곡들을 가리킨다. 이 곡들은 ricercare, fantasia, fancy, capricio, fuga, verset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바로크 후기에 이르면 모두 fuge에 통합된다.

2. canzona형의 곡들: 비연속적인, 다시 말해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모방 대위법에 의한 곡들을 가리킨다. 중간부분에 대위법적인 양식이 아닌 다른 양식이 끼어 들 수도 있다. 이 곡들은 17세기 기악음악에서 가장 중요하게 발달되는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로 이어진다.

3. 변주곡: 주어진 선율(베이스 포함)을 토대로 하는 곡으로서 주로 주제와 변주 또는 partita, 파싸칼리아나 샤콘느, 코랄 프렐루드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4. 춤곡: 어느 정도 양식된 춤 리듬에 의한 곡들을 엮어 놓거나 긴밀하게 연결시킨 춤 조곡 등이다.

5. 즉흥곡: 독주 건반악기나 루우트를 위한 즉흥 양식에 의한 곡들로서 토카타(toccata) 판타지아(fantasia), 프렐루드(prelude)등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1)리체르카레

ricerare 형의 곡을 가리킨 여러 명칭들은 무분별하게 쓰여진 용어의 남용이므로 크게 유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러한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명칭으로 불리우던 곡들은 17세기 초엽부터 독일에서 시작하여 푸가라는 이름으로 통일된다. 주제가 하나 뿐인 리체르카레 형의 곡이 서서히 푸가를 탄생시킨 반면,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진 칸쪼나는 바로크 소나타로 발전한다.

(2)칸쪼나

소나타라는 용어는 17세기에 시작된 기악곡의 명칭으로서 아주 모호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형식은 칸쪼나와 같지만, 특별한 면을 갖는 곡을 칭하게 된다. 17세기초에 소나타라고 불리는 곡은 한 두개의 선율악기(보통 바이올린)와 지속저음으로 이루어진 곡이 보통이었다. 이에 반하여 합주 칸쪼나는 원래 노래(칸쪼나)를 4성부로 연주함으로서 출발한 형식이기 때문에 지속음 없이도 연주될 수 있었고 4성부로 쓰여진 곡이었다. 그러나 소나타는 특정한 악기를 지목해서 연주하게끔 쓰여진 경우가 많아서 그 악기의 특유한 연주법의 가능성을 즐길 수 있었다. 소나타는 자유스럽고 표현적인 성격을 갖는 곡이었던 데에 반해, 칸쪼나는 르네상스 전통에 따른 기악 다성음악이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칸쪼나와 소나타는 한데 섞여서, 칸쪼나라는 용어는 점점 소나타라는 용어로 바뀌게 된다. 이런 곡 중에서 많은 곡들이 교회에서 사용될 목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 이름음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로 불리게 된다. 소나타는 여러 다양한 악기와 악기군을 위해 쓰여졌다. 그중 바이올린 두개와 지속저음이 가장 흔하였다. 두개의 높은 음이 선율부를 맡고 여기에 지속 저음을 덧붙이는 음악적 짜임새가 17세기를 일관하여 작곡가들의 특별한 애호를 받았다. 이런 형태의 소나타를 trio sonata라고 불렀다.

(3)변주곡

변주곡의 원리는 17세기의 대부분의 기악 형식에 침투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를 변주곡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제와 변주라는 악곡의 구성 형식은 르네상스 말기의 애호되던 건반 악기를 위한 음악 형태의 계승이다. 보통 세기지 기법이 쓰였다. 그 첫 번째는 선율을 변형시키지 않고 반복하되 그것을 한 성부에서 다른 성부로 옮기거나 변주곡이 진행됨에 따라 다른 대위법적 재료로 감싸는 방식이다. 이를 칸투스 피르무스(cantus firmus) 변주곡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선율 자체에 손을 데어 변주곡이 진행됨에 따라 다른 장식음으로 꾸미는 것이다. 대개 선율은 꼭대기 성부에 두고 이를 받쳐주는 화성은 변하지 않는다. 17세기초에 파르티타(partita)라는 말이 변주곡을 지칭하는 말로서 쓰인 것은 우연이다. 이는 partita의 뜻이 분할이라는 의미로서 변주곡 하나 하나가 분할되어 있다는 뜻에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에 파르티타라는 말은 춤 조곡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다. 그러나 세 번째의 변주곡 형식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한다. 변주곡은 베이스 또는 화성적 구조가 형식의 기초가 된다. 이 변주 방식은 바로크의 모든 변주곡 중 가장 융통성이 있는 형식으로서 17세기말과 18세기초의 중요한 작품의 틀로 사용되었다.

변주곡에서는 변하지 않는 요소는 이렇듯 베이스의 선율 선일 뿐만 아니라 화성의 연결일 수도 있고, 화성의 구조만일 수도 있다. 이러한 변주의 방식은 샤콘느나 파싸칼리아라고 하는 기악곡에도 자주 나타난다. 이런 곡들은 대개 짧고 명확히 드러나는 순환저음의 선율 또는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기초 저음을 갖는다.

(4)춤음악

17세기의 춤 음악은 그 양에 있어서나 다양성에 있어서 풍부함을 보인다. 춤 음악은 음악 자체로도 중요성을 지니지만, 춤 리듬들이 다른 음악, 즉 성악, 기악, 종교/세속 음악 모두에 침투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사라반드의 특유한 리듬이나 지이그의 활발한 움직임이 춤 음악이 아닌 많은 다른 작품에 나타난다. 춤 음악은 독주와 합주를 위해서 쓰여졌다.

기악 합주를 위한 춤 조곡이 17세기 독일에서 생겨난다. 대개의 경우 비올 합주를 위한 것이지만, 다른 악기인 바이올린이나 코르네트도 대치될 수도 있었다. 조곡 생산에 자극을 준 것은 독일에 거주하는 역구 작곡가들이었다. 조곡을 짧은 곡들의 단순한 열결로 보지 않고 음악적인 하나의 통일체로 여겨 여러 악장으로 된 한 작품으로 본 것은 독일인들의 공헌이었다. 프로베르거(Johann Jacob Froberger, 1616-67)에 의해 프랑스의 춤 음악 양식이 독일로 옮겨져, 알라망드, 꾸랑뜨, 사라반드의 구성을 춤 조곡의 표준으로 확립하였다. 프로베르거의 필사본에는 춤 조곡은 느린 사라반드로 끝났으나. 그가 죽은 후 1693년에 출판되 악보에는 활발한 지그가 끝에 오도록 개편되었다.

(5)즉흥적 작품

즉흥적 작품의 성격은 토카타, 판타지아, 프렐루드 등에 나타난다. toccata는 이탈리아 어인 toccare(만지다)에서 유래되었고 판타시아(fantasia)는 팬시(fancie)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판타지아는 건반악기등의 독주 악기를 위한 곡으로 연주자의 기교를 과시한다. 프렐루드(prelude)는 전주곡으로서 판타시아 처럼 푸가에 앞서 연주됨으로서 푸가를 위한 도입, 대조의 역할을 하기 위해 푸가와 짝지우게 된다. 이 짝지움은 일반화되어 프렐루드와 푸가, 판타시아와 푸가등은 단일한 곡명으로 여겨지게 된다.

토카타는 기교적이고 그 형식은 자유롭고 즉흥적인 성격을 지닌다. 리듬과 선율의 변화가 풍부하고 선율적으로 풍성하며 대위법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토카타에 특히 요구되는 것은 연주되는 악기의 특색을 잘 살리는 것이다.

4.바로크 후기의 기악음악

지금까지 우리는 리체르카레와 푸가, 칸쪼나와 소나타, 여러 변주곡 형식들, 춤곡과 조곡, 토카타와 즉흥곡들을 살폈다. 바로크 초기의 이러한 발전을 거쳐, 18세기 초에 이르면 바로크의 기악 음악은 건반악기를 위한 음악과 합주를 위한 음악으로 나누어 살펴야 하기에 이른다. 건반 악기 음악은 오르간,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를 위한 음악이고 합주음악은 실내악과 그 보다 규모가 큰 기악합주를 위한 음악이다.

건반 악기를 위한 형식은 토카타(또는 프렐루드, 판타지아)와 푸가, 변주곡, 코랄 편곡, 변주곡, 파사칼리아와 샤콘느, 조곡, 소나타(1700년 이후)등이다. 합주를 위한 형식은 소나타(교회 소나타, sonata da chiesa), 신포니아(sinfonia), 조곡(실내 소나타, sonata da camera), 협주곡 등이다.

(1)건반 음악

바로크 말기 북부 독일에서 개발된 오르간 작품에는 세가지 주된 종류가 있었다. 그것은 토카타, 푸가, 오르간 코랄이었다. 토카타는 본래부터 즉흥 연주의 효과를 목적으로 하는 음악 양식이었으며 바로크 후기에 이르면 화음, 선율, 리듬 등에 과격한 변화를 주어 이점이 더욱 강조된다. 결국 토카타는 바로크 정신이 갖는 환상적이고 극적이며, 분출하는 듯한 면모를 음악으로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토카타는 바로크 정신이 갖는 환상적이고 극적이며 분출하는 듯한 면모를 음악으로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토카타의 이러한 무절제한 자유스러움을 규제하기 위하여 음악적으로 정반대되는 리체르카레라는 굴레를 씌워주었다는 것도 극히 과감한 방법을 채용했다는 점에서 역시 바르코적 정신의 일면을 보여주는 점이다. 작곡가들은 일찍부터 토카타에 잘 규제된 모방대위법 부분을 도입하여 광상곡 양식으로 흐를 수 있는 부분과 대조시켜 왔다. 17세기가 지나는 동안에 분명하게 끊어지는 대칭적 악구에 대한 요구가 점점 강해졌다. 그리하여 푸가 풍의 간주를 갖지 않는 짧은 토카타에서 초차 광상곡적인 음의 흐름에 통제된 구절이 삽입되었다. 그것은 바로크 말기의 음악에서 가장 널리 쓰인 구체화된 수법인 연쇄적으로 진행하는 선율과 그것의 연쇄적인 모방이었다.

푸가는 독립된 곡으로도 쓰였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푸가는 거의 완전하게 옛 리체르카레에 대치된다. 푸가의 주제는 리체르카레의 주재보다 선율의 성격이 확실하고 리듬이 보다 활발하다. 리체르카레는 평온하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발전되며, 다양성이나 뚜렷한 절정이 없는 데에 비하여, 푸가는 힘차게 결말까지 밀고 나간다. 푸가에는 짧은 에피소드들이 있으며, 이 부분은 짜임새를 조금 가볍게 하여 다른 부분과 구별되었으나 래체르카레에는 에피소드 부분이 적으며 있을 경우에도 다른 부분과 짜임새의 면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푸가는 뚜렷한 주음, 속음 관계에 의한 조성체계를 갖는데 반해 보수적인 리체르카레는 옛 교회 선법의 체계 쪽에 가까운 채로 남아 있었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오르간 작품으로서 중요한 다른 한 형태는 코랄 선율에 기초한 작품들이다. 당시 작곡가들이 코랄을 사용한 방법에는 세가지 주된 형태가 있었다. 변주곡의 주제, 파타지아의 주제, 그리고 선율로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 세가지 사용 방법은 세가지 뚜렷한 작곡 형태를 만들었다. 코랄 파르티타, 코랄 판타지아. 코랄 프렐루드가 그것이다. 코랄 파르티타는 코랄 선율에 붙인 변주곡이며 슈벨링크, 샤이트 등에 의해 비롯되어 바하 시대와 그 이후에 까지 작곡가들에 의해 계속해 작곡되었다. 코랄 판타지아는 라인켄, 북스테후데 등을 비롯한 북부 독일 작곡가들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코랄 프렐루드는 코랄을 멜로디로서 사용한 모든 작품에 적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코랄 선율이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곡은 모두 코랄 프렐루드라고 불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의미 코랄 프렐루드는 비교적 늦게 17세기 후반 부터 나타난다. 이 곡은 기능적인 의전 음악에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오르가니스가 회중이나 성가대가 코랄을 부르기 전에 서주로서 장식을 붙여 연주한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후에 이러한 양식의 곡은 의전적 목적과는 관계없이 코랄 프렐루드로 불린다.

바로크 말기에 널리 사용된 또 하나의 형식으로서 파싸칼리아 또는 샤콘느가 있다. 17세기 전반의 셩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 형식은 간단한 4마디 또는 8마디의 화성의 음형이 끊임 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극도로 제한된 이 뼈대 안에서 작곡가는 재능을 발휘하여 악장 전체의 지속성, 다양성, 추진력(절정까지 밀고 가는 힘)을 획득해야 한다. 파싸칼리아 중에는 특정한 베이스 선율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보다는 화성의 패턴이 반복되는 요소로서 사용되는 것이 더 많았다. 화성은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 변화되기도 하지만 규칙적인 종지형을 갖는 본래개의 4마디 또는 8마디를 분절법을 그대로 유지한다. 파싸칼리아와 샤콘느의 특징적인 리듬은 느리게 움직이는 3박자이다.

주어진 음악적 소재, 즉 멜로디를 변주하여 곡을 만드는 방법은 바로크 음악 작품에서 가장 널리 쓰인 기법이다. 주제(에어Air, 춤곡, 코랄)의 기본적인 편곡에 뒤이어 일련의 변주곡들이 뒤따르는 형식은 기악 음악의 역사에서 아주 일찌 부터 나타난다. 바로크 말기에도 본질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코랄 파르티타를 제외하고는 옛날의 칸투스 피르무스 형의 변주곡를 멀리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17세기 중반 이후 자곡가들은 변주곡의 주제를 스스로 작곡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증가하게 된다.

(2)합주 음악

1700년 초에 이르면 이탈리아 자곡가들은 프랑스의 클라브상 연주자들과 북부 독일의 오르가티스트에 의해 이탈리아 음악의 우위가 도전 받게 된다. 그러나 오페라, 칸타타, 기악 실내음악의 영역에서 이탈리아인들은 논의의 여지 없는 대가들이었고 유럽의 스승이었다. 클레모나의 바이올린 제작자들인 아마티(Nicoolo Amati; 1596-1684), 스트라디바리(Antonio Stradivari; 1644-1737), 구아르네리 (Giuseppe Bartolomeo Guarneri; 1698-1714)등의 바이올린 제작자들의 명성이 말해주듯 이 시대는 이탈리아의 위대한 현악 음악의 새대이기도 했다.

(3)합주 소나타

소나타(sonata)라는 말은 17세기 초에는 성악 작품의 기악 서주나 간주곡을 지칭하는에 쓰였다. 1630년 이후에도 이러한 뜻으로 자주 쓰였지만, 소나타와 신포니라는 말은 갈 수록 독립된 기악 작품을 지칭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게 된다. 1660년 경 이후 부터 두가지 주된 형의 소나타가 분명히 구분된다. 교회 소나타(sonata da chiesa)는 그냥 소나타로 불리기도 하였다. 교회 소나타는 각 악장이 뚜렷한 춤 리듬을 갖지 않은 것이었고 그런 명칭을 갖지 않는 소나타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반면, 실내 소나타(sonata da camera)는 양식화된 춤의 모음곡이다. 처음에는 두가지가 섞여 혼동을 일으키는 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 소나타 중 한 두 악장에서 춤곡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1670년 이후 교회 소나타와 실내 소나타는 모두 두개의 높은 음 악기(대개 바이올린 둘)와 베이스 그리고 화성을 채워 넣는 지속음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소나타를 앞서 말했듯이 트리오 소나타(trio sonata)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의 연주자는 네사람이다. 지속 저음은 첼로 등의 저음 악기로 중복되고 하프시코드나 오르간은 그 지속음을 연주하며 위에 화성을 채워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트리오 소나타로 대표되는 성부의 짜임새의 관습은 바로크 시대 음악의 다른 형태에도 많이 나타나 바로크 이후에 까지 계속된다. 고전 시대의 메뉴엣의 중간 부분을 트리오 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17세기에는 트리오 소나타 보다 그 수가 적었으나 1700년 이후 그 수가 많아지는 것이 독주 바이올린(또는 풀루투, 비올라 다 감바)와 지속저음에 의한 소나타이다. 이를 독주 소나타라고 부른다. 이외의 다른 형태로는 반주가 없는 독주 현악기를 위한 소나타도 있었고 여섯개 많을 경우에는 여덟개의 악기와 지속음으로 이루어진 소나타도 있었다.

17세기 작곡가들이 애호했던 형식이 독주 소나타가 아니라 트리오 소나타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편성은 서정적인 선율과 투명한 다성음악의 이상적이 조화를 얻게 해주기 때문이다. 두개의 바이올린은 선율을 대위법적으로 짜나갈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대위법을 방해하지 않는 하프시코드의 화성으로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성부가 무시당하는 경우가 없으며 화성적 방향감의 상실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독주 소나타가 과도한 기교의 과시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던 반면에 트리오 소나타는 각 성부의 힘이 규형을 갖추어 합주로 규합함으로서 음악적 관심을 외적인 전시효과 보다는 내적인 음악적 내용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4)코렐리

이 시기의 음악, 즉 바로크의 청정하고 고전적인 면모를 잘 보여 주는 가장 완벽한 예를 우리는 코렐리(Arcangelo Corelli, 1653-1713)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트리오 소나타, 독주 소나타, 협주곡 등이 있다. 코렐리는 그의 트리오 소나타에 17세기 말 이탈리아 실내 음악의 모든 업적을 요약하였다. 그는 독주 소나타와 협주곡으로서 향후 50년 간의 음악의 발전의 기틀을 잡았다. 당시의 모든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노래를 썼을 만큼 이탈리아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형태의 성악곡도 쓰지 않은 대신 이탈리아 국민이 갖는 노래 애호의 성향을 바이올린으로 옮겨 놓았다. 바이올린은 인간의 목소리가 갖는 서졍성과 표현성을 그대로 닮은 악기이다.

코렐리의 음약을 통털어 한 가지 기본적인 것는 선율이 음계의 한 단계씩 옮겨 가며 반복되는 연쇄(sequence)다. 바로크 작곡가 중에서 이 구성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광법위하게 사용한 대표적인 작곡가인 코렐리는 이 기법으로 인해 교회선법의 제취를 완전히 털어 버리고 장조-단조의 조성을 확립시킬 수 있었다. 시퀀스 사용이 자연스럽게 장단조의 조성을 확립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코렐리의 트리오 교회 소나타의 4악장은 당시 칸타타 4약장 순서의 유형을 따라 느림-빠름=느림-빠름의 순서로 된 것들이 않다. 같은 순서를 17세기말과 18세기 초의 작곡가들도 자주 썼기 때문에 이를 바로크 소나타의 표준형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 일반적 규칙에 대한 예외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게 속단하기는 어렵다.

코렐리의 대부분의 트리오 소나타에 모든 악장들이 같은 조로 되어 있는 것은 17세 기의 한 전형이다. 그러나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독주 소나나타의 경우 장조로 되어 있는 것은 모두 관계 단조의 느린 악장을 하나씩 가지며, 합주 협주곡들은 모두 대조되는 조로 된 느린 악장을 포함한다. 그러나 한 악장 안에서 대조 되는 주제 다시 말해 대주제는 없다. 한 악장의 음악적 전개를 위한 주제는 단번에 뚜렷한 종지로 끝 맺는 완결된 형태로 이루어진다.

주제가 주어진 다음에는 시퀀스, 가까운 조로 종지되는 짧은 전조, 매력적이며 미묘한 분절법 등의 기법으로 주제는 끊임 없이 확장되고 펼쳐진다. 한 주제를 계속해서 펼쳐 나가는 이 방법을 실뽑기(독일어로는 이를 Fortspinnung이라고 하며 바로크 후기의 한 두드러진 특징이다.

코렐리의 독주 소나타들은 같은 형의 트리오 소나타들과 악장의 순서와 성격이 같지만, 그의 독주 소나타에는 짜임새가 대조되는 빠른 악장이 하나 추가되어 다른 두개의 빠른 악장 중의 하나와 짝을 이루게 된다. 독주 소나타는 트리오 소나타보다 화성적으로 처리된 악장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코렐리의 가장 뛰어난 혁신은 바이올린의 기교적 처리이다. 제3 포지션(third position, 운지법으로서 손가락이 지판 위쪽으로 3단계 가지 올라가는 포지션)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중음(double stop), 삼중음(triple stop), 빠른 달림음(run), 아르페지오, 카덴짜, 모토 페르페투오(無弓動, moto perpetuo)등의 연습곡적인 악장들이 있다. 이 독주 소나타들은 코렐리가 그의 학생들에세 어떤 식의 기교를 기대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가르침은 18세기의 대부분의 바이올린 악파의 기초가 되었다.

(5)즉흥적 요소

바토크 시대의 연주자들은 작곡가가 기록한 악보에 여러 음을 추가해서 연주해야 했다. 예를 들어 숫자 저음의 연주는 연주자에 손에 달려 있었다. 성악과 기악 모두, 독주 선율은 연주자의 기교, 감각, 경험에 따라 장식음을 적당히 써서 완성해야 했다. 후에 이런 부분은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기보되든가 또는 어떤 기호에 의해 표시되었지만, 항상 어떤 즉흥적인 색채를 유지했다.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장식음이라는 말은 선율에서 본질이 아닌 없어도 무방한 음들을 첨가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크의 관점은 그렇지 않았다. 장식음은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나타내는 구체적이고 표현적으로 기능하였으며 나아가서는 흔히 사용하는 장식음의 안목으로만은 잘 알아차릴 수 없는 불협화적인 독특한 장식음도 사용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장식음을 첨가하는 능력은 음악을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심오한 경지의 기술이었다.

바로크의 독주 바이올린 소나타는 시초부터 특별한 운궁법, 복합음, 기타 온갖 종류의 어려운 기법을 실험하는 매체가 되었다. 1676년 스케르치(Scherzi)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발터(Johann Jackb Walter, 1650-1717?)의 12개의 소나타 모음집은 기법의 면에서 그때까지 알려졌던 모든 수준을 능가하는 곡들이었다. 기교적인 연주자이면서 보다 넓은 음악적 폭을 가진 작곡가가 비버(Heinrich Ignaz Franz Biber, 1644-1704)가 주로 기억되는 이유는 1675년 경에 쓴 15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생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바로크 시대의 표제 음악의 특출한 예인 이 곡들은 스코르다투라(scordatura, 어떤 화음의 연주를 쉽게 하기 위한 바이올린 현의 비정상적인 조율)을 상당히 많이 쓰고 있다. 이 소나타 모음집 말미에 첨부되어 있는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싸칼리아는 아마도 바하의 위대한 D단조 샤콘느를 예시한 중요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비버와 발터 이후 독일 바이올린 작곡가들은 거의 모두가 이탈리아 악파의 영향 아래고 들어 갔으며 이를 기초로 국제적인 양식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역시 코렐리의 제자인 제미니아니(Francesco Geminiani, 1687-1762)는 기교파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런던에서 1751년 바이올린 교본을 출판한다. 이 책은 18세기 초의 코렐리를 비롯한 이탈리아 대가들이 가르쳤던 기본적인 기교의 원칙들과 그 해석을 담고 있다. 제미니아니의 독주 소나타와 합주 협주곡 등은 코렐리 양식에 기초를 두고 그 위에 보다 진보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6)관현악 음악

17세기 말에 이르러 실내 음악과 관현악 음악의 차이가 분명하게 구별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한 성부에 한 악기만으로 된 합주 음악과 여러 악기들이 한 성부를 함께 연주하는 합주음악이 구분된다는 뜻이다. 17세기 합주음악을 보면 작곡가가 어느 쪽을 의도하였는지 분명치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 선택은 임의적일 수도 있었다. 두개의 독주 바이올린을 생각하고 쓰여진 트리오 교회 소나타도 교회가 크거나 어떤 축제일 경우에는 관현악 합주로 연주될 수 있었다. 반면, 신포니아라는 제목이 붙거나 베이스 위에 셋, 넷 또는 그상의 선율 성부가 있다고 해서 꼭 관현악 규모로 연주할 필요가 없었다.

오페라 극장들은 관현악단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오페라 서곡, 푸랑스 오페라의 춤곡들을 관현악만을 위한 음악으로 생각되었으며 그 양식도 실내 연주보다는 관현악 연주에 맞도록 쓰여 졌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관현악단은 파리 오페라 관현악단이었다. 이곳에서는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87)의 엄격한 통제 밑에 그만큼 큰 규모의 연주단으로서는 그때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고도의 기술적 완성을 이루고 있었다.

(7)관현악 조곡

륄리의 독일인 제자들은 프랑스의 연주 수준과 함께 프랑스의 음악 양식을 독일에 소개하였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1690년경 부터 1740년경 까지 새로운 형의 관현악 조곡이 유행하게 되었다. 륄리의 발레와 오페라를 귀감으로 삼은 이 조곡들은 어떤 표준적인 순서에 따라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이 조곡들은 항상 프랑스 서곡의 형식에 따른 한 쌍의 악장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조곡들은 오래지 않아서 우베르뛰르(ouverture)라는 명칭을 얻게 된다. 무파뜨(Georg Muffat, 1690-1770)의 플로릴레지움(Florilegium, 1695와 1698)은 이러한 조곡의 초기 모음곡집 중 하나이다. 또 하나의 모음집은 핏셔(Johann Caspar F., c.1665-1746)의 "봄의 일기장'(Journal de Printemps, 1695)이다. 우베르뛰르 조곡은 이밖에도 푹스, 텔레만, J.S.바하 등을 포함하는 많은 독일 작곡가들에 의해 작곡되었다.

(8)협주곡

새로운 종류의 관현악 작품인 협주곡(concerto)이 17세기 마지막 20년에 등장하여 1700년 이후에는 바로크 관현악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형태가 된다. 협주곡은 바로크의 순수 기악 음악이 갖고 있었던 네가지 기본적인 관습을 종합하였다. 그 네가지는 콘체르타토 원칙, 견고한 베이스 위에 유려한 상성부, 장조-단조의 조성 체계, 그리고 독립된 여러 악장에 의한 긴 작품의 구성 등이었다.

1700년을 전후하여 세가지 종류의 협주곡들이 쓰이고 있었다. 그 하나인 관현악 협주곡(Orchestra. conderto, 또는 Concerto-sinfonia라고도 불린다)은 여러 악장은 갖는 보통 관현악 작품으로서 그 양식은 제1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강조하며 소나타나 신포니아처럼 복잡한 대위법적 짜임새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 보다 수도 많고 보다 중요했던 당신의 다른 두가지 협주곡들은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 또는 grand concerto)와 독주 협주곡(solo concerto)이었다. 이 협주곡들은 체계적인 음향적 대조성을 지니고 있었다. 합주 협주곡은 소수의 독주 악기군의 음향을 독주 협주곡은 한 악기의 음향을 전체 관현악의 음향과 대조시키는 것이었다. 이른바 "관현악"은 거의 언제나 현악 합주로서 대개 제1, 제2, 바이올린, 비올라, 바이올린 첼로, 비올로네 그리고 지속저음으로 구성되었다. 독주 악기들도 대개는 현악이었다. 독주 협주곡에서는 바이올린, 그리고 합주 협주곡의 경우 다른 현악기나 관현악기가 추가 또는 대치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두개의 바이올린 과 지속음이었다. concerto grosso라는 말은 본래 "큰(grosso) 악기군", 다시 말해 관현악을 말하는 것으로서 독주 악기군, 즉 Concertino(tino는 축소어미임) "작은 악기군"의 대칭되는 뜻이었다. 후에 이 concerto grosso라는 말은 대칭되는 악기군을 사용하는 작품 전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독주 협주곡에서나 합주 협주곡에서나 전체 관현악을 지칭하는 말은 tutti(모두), 또는 ripieno(전체)라고 한다.

협주곡은 소나타나 신포니아아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미사의 "서곡"으로 그리고 의식의 중간의 필요한 부분에 연주되기도 하였다. 크리스마스 미사를 위하여 작곡가들은 목가(pastoral) 양식의 악장을 추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코렐리의 크리스마스 협주곡(작품 6, 8번)에는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히는 목가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크 말기의 또 다른 목가 악장의 예로는 바하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제2부 시작의 Sinfonia, 헨델의 메시아 제1부의 Sinfonia pastorale등이 있다.

9)토렐리

세기가 바뀔 무렵 협주곡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했던 작곡가는 볼료나 악파의 마지막 거장이었던 토렐리(Giueseppe Torelli, 1658-1709)였다. 여섯개의 합주 협주곡과 여섯개의 독주 협주곡 모음집인 토렐리의 마지막 출판(1709)에 있는 바이올린 협주곡들에서 우리는 혁신의 중요한 단계를 볼 수 있다. 이 곡들은 대개 세 악장(빠름-느림-빠름)으로 되어 있으며 이 배치는 후일의 협주곡 작곡가들이 널리 사용하는 틀이 된다. 빠른 악장인 알레그로들은 푸가적 양식이고, 가운데 악장은 비슷한 두개의 아다지오와 사이에 삽입된 짧은 알레그로로 구성된다. 토렐리의 활기차고 힘있는 알레그로 주제들은 18세기 초의 하나의 음악적 특징이 된다. 토렐리의 중요한 업적은 알레그로 악장의 형식이다. 이 형식은 관현악으로 주제를 완전히 제시함으로써 시작된다. 독주 에피소드들과 교대되면서 이 튜띠의 재료는 조금 변형되고 다른 조로 전조되어 두번이나 세번 반복된다. 이 악장은 처음 제시 되었던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마지막의 주조로 튜띠로 균형을 되찾으며 종결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협주곡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튜띠를 리토르넬로(ritornello)라고 한다. 이 구조 바로크 후기의 협주곡의 첫 악장과 끝 악장에 전형적으로 항상 나타난다. 이 형식은 론도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중요한 차이점은 리토르넬로가 처음 것과 마지막 것을 제외한고는 전부 다른 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협주곡은 반복의 출현이라는 원칙과 더불어 이에 못지 않게 조성적 변화를 상호 관계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출처 : 우리와음악
글쓴이 : 파르티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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