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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Eric Satie(에릭 사티) Gnossiennes I
음악의향기
2008. 12. 13.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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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그노시엔느
Eric Satie, 1866-1925, 프랑스
Gnossiennes
5 Modere
Album : Afer The Rain
1. Lent 2. Avec etonnement
3. Lent 4. Lent
5. Modere
6. Avec conviction et avec une tristesse rigoureuse |
1889년부터 1893년 사이에 5번, 1번, 2번, 3번, 4번, 6번 순으로 작곡되었다. 제5번의 경우 특히 오른손 연주가 화려하고 왼손은 사티가 1889년 대(大)전람회에서 들었던 이국적 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동양적' 스케일을 사용한다. 이 작품들은 모두, 조옮김과 조바꿈에서 작은 악절을 반복하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마딧줄을 전부 삭제한 것은 아마도 중세의 악보와 기보법(記譜法)에 대한 사티의 깊은 관심에서 비롯된 듯 하다. 연주자를 위한 기묘한 지시사항을 적어놓았는데 이러한 법은 1917년경 까지 계속되었다.
Satie Gnossienne No1
No2 Avec etonnement
Gnossienne No3 Lent
Gnossienne No4 Lent
Gnossienne No5 Modere
Gnossienne No6
6 Gnossiennes
이 곡은 짐노페디(GYMNOPEDIE) 보다 훨씬 대중적(?)인 모습을 띄고 있기도 하다. 특히, 19세기 말엽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morden하기도 하고 마치 현대 Newage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사티는 거의 최악에 가까운 빈민굴로 자발적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가난한 이유도 있겠지만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출가한 수도승처럼 인간 세상을 오히려 관조의 시선으로 조망하고 싶었던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에게 삶은 하나의 실험이자 꿈의 공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끊임없는 새로운 소재들이 필요했던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것이 속세의 낮은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빈곤과 기이함으로 보였을지라도 사티는 기꺼이 구도승처럼 나서서, 한 시대를 앞서는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Gnossien, Gnossienne:
명사 및 형용사. 고대 지리에 있어서의 그노스 주민. 그노스 또는 그노스인의 . 크레타인을 가리켜 그노스인이라고도 한다. 사티는 먼 옛날을 연상시키는 말을 발견해 냈다. 속세를 벗어난 듯한 인상을 주는 말이다. '짐노페디'못지않게 '그노시엔느'도 침묵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드뷔시 음악의 침묵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사티 음악의 침묵은 無와 통하는 것이다. 드뷔시의 음악이 종종 '울창한 숲 속의 잠자는 공간을 비상'하고 있는 데 비해 사티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듯한 느낌을 준다. '세개의 그노시엔느'는 사티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강박 관념, 또는 자기도취적인 측면을 잘 표현한 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초월한 음악의 좋은 예이다. 도입부도 없고 종결부도 없는 음악이며, 때도 없이 시작되고 결코 끝나지 않는 음악이기도 하다.
사티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노시엔느'의 악보에도 마딧줄이 없다. 선율의 흐름이 규칙적인 마디의 테두리에 익숙하지 않으며 마디줄이 없는 것은 그레고리안 성가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노시엔느'는 3곡으로 완결되었다. 이외에도 5곡의 그노시엔이 이미 씌어져 있기는 했으나 오랫동안 출판되지 않았고 사티 자신이 출판한 곡의 타이틀은 3개의 그노시엔느 뿐이다. 세 곡의 공통점은 저음부의 완전화음 위를 선법적인 색채를 띈 선율 또는 그 단편이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에릭 사티 (Eric Satie, 1866-1925, 프랑스)
사티는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신조나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간 '세기말의 반항아'였다. 그는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들을 써냈다. 괴팍한 아이디어와 신랄한 유머, 그리고 신비주의와 순수에 대한 이념이 그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만들어냈다. 파리음악원을 마친 후 1884년부터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곡계에 뛰어든 그는 <오지브>(1886) <사라방드>(1887) <짐노페디>(1888) 등을 통해 단선 성가풍의 투명한 음악들을 선보였다.
1890년에 몽마르트로 이사간 그는 기괴한 옷을 입고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 시기부터 드뷔시와 친교를 가졌으며, 또한 신비주의적 비밀결사인 <장미십자교단>의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장미십자교단의 종소리>와 같은 작품을 써냈다. 그는 <지휘자 예수의 예술 메트로폴리탄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일한 교인이 된 적도 있다. 1898년 파리를 떠나 아르쾨유로 간 그는 조그만 방에 기거하면서 죽는 날까지 살았다.
항상 아마추어로 취급받는데 대해 불만을 느낀 사티는 1905년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알베르트 루셀에게 다시 음악을 배웠으나 그의 음악은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1917년에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는 반전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수법과 혁신적인 사티의 사상은 미래파의 출현을 예고해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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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우리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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