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세계

[스크랩] 시인 - 박인환(朴寅煥, 1926 ~ 1956)

음악의향기 2006. 9. 24. 15:56



박 인 환 (朴 寅 煥 )


    1956년 이른 봄.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어느 정도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는 명동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경상도집 」에 몇 명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羅愛心(나애심)도 함께 있었는데,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러나 나애심은 노래를 하지 않았다. 朴寅換(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갔다.그것을 넘겨다보고 있던 李眞燮(이진섭)이 그 시를 받아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그 악보를 들고 나 애심이 노래를 불렀는데,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한 시간쯤 지나 宋志英(송지영)과 나 애심이 자리를 뜨고,테너 林萬燮(임만섭)과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李鳳九(이봉구)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그 노래소리를 듣고 명동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술집 문앞으로 몰려 들었다.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노래 - 박인희   해방후 평양 의학 전문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부친과 이모로부터 차입한 돈 5만원으로 시인 吳章煥(오장환)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20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받아 초현실주의 화가 朴一英(박일영)의 도움을 받아 간판을 새로 달고 재개업한다.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했던 서점 「茉莉書舍(마리서사)」이다. 서점 명칭은 일본시인 安西冬衛 (안서동위)의 시집 「軍艦茉莉」(군함마리)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은 불가능하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이었는데,문학인 들과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서점이었다.앙드레 브르통,폴 엘뤼아르,마리 로랑생,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 시인들의 시집,「오르페온」「판테온」「신영토」「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마리서사」에는 하루도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金光均(김광균)이봉구 金起林(김기림) 오장환 張萬榮(장만영) 鄭之溶(정지용) 金光州 (김광주) 등 시인, 소설가들,「新詩論(신시론)」동인 金洙暎(김수영) 梁秉植(양병식) 金秉旭(김병욱) 金璟麟(김경린) 등,조향 이봉래 등의 「후반기」 동인들,화가 최재덕 길영주들이 「마리서사」 의 단골손님들이었다. 특히 김수영은 박인환 동년배로 동인활동을 함께 하며 「새로운 都市(도시)와 市民(시민)들의 合唱(합창)」이라는 앤솔로지를 내기도 하는 등 두터운 교분을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 둘 사이는 소원해졌다. 김수영은 진보주의자이며 서구적인 새로운 것에 경도되었던 박인환의 취향을 경박하며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 몰아붙이며 경멸하고,박인환은 김수영이 세속적인 눈치만 보는 속물 이라고 비난했다. 박인환은 1926년 8월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부친 朴光善 (박광선)은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으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토지도 어느 정도 소유한 시골 살림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여,부친은 아들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서울로 생활터전을 옮기며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들이 인제에서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빼기로 이사를 하고,그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1939년 박인환은 경기공립중학교로 진학하는데, 이 무렵 영화와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어 공부 대신에 일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과 일본 상징파시인들의 시집을 열독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 였다. 결국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기 중학을 중퇴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에 편입하여 그곳을 졸업한다.졸업 뒤 부친의 강요로 3년제 관립학교인 평양의전에 진학하지만,해방이 되자마자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온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을 한 미남자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댄디보이」 였다. 여름에도 정장을 하곤 했던 그는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 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고 말했다. 어느날 그는 친구들 앞에 땅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나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세닌이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 사진을 본떠 미 군용 담요로 지어 입은 것이다.그와 가까이 지냈던 시인 金次榮( 김차영) 은 말한다.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 흐린 날은 손잡이가 묘한 박쥐우산,봄가을엔 우유빛 레인코트,또 겨울엔 러시아 사람 들처럼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진회색도 검정도 아닌 중간색의 헐렁한 외투를 입고 다녔다" 박인환은 통속적인 것을 혐오하고,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내 보이곤 했다. 수주 변영로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문인 선후배들이 함께 모여 있던 한 영화의 시사회장에서 느닷없이 일어나 선배 평론가 백철을 향해 "어이,백철씨 저걸 알아야 돼. 저걸 모르고 무슨 평론을 한단 말이오!" 라고 일갈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그가 생애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 중의 하나가 책이었다. "그는 보기드문 愛書家(애서가) 였다. 양으로는 대단치 않았으나 책을 다루는 폼이 이만저만한 애서가가 아니었다. 이 회고담이 실릴 「현대문학」만 하더라도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 가지고 다녔다" 라는 장만영의 회고대로 그는 보기드문 애서가였다. 당시 한국일보에 다니던 시인 金奎東(김규동)의 사무실에 가끔 나타나 "吳昔泉(오석천)선생을 만나야 한다" 고 우물쭈물 앉아 있다가 김규동이 자리를 비우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경제나 정치서적 까지 슬쩍 집어들고가 수집하곤 했다.



        목마와 숙녀 (낭송 박인희)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 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출전: <시작(詩作>, 1955.10

    李箱(이상)을 좋아했던 그는 이상의 기일인 3월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했다(그러나,이상이 실제로 죽은 것은 1937년 4월17일 새벽 4시경이었다). 그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간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 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메모지를 건네며,무슨 예감이라도 했던 사람처럼 박인환은 씩 웃었다.20일밤 만취상태로 세종로에 있던 집에 돌아온 그는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유언처럼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956년 3월20일 오후 9시였다. 그는 「잡지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의 갑작 스런 부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꼿꼿이 누워 천장을 향해 눈을 치뜨고 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송지영이 감겨주었고, 또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게 조니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그의 지인들은 그가 좋아 했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도 함께 묻어 주었다.

        얼 굴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를 닮은 한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듯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방안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으로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가는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건 비 문 인제가 낳은 시인 박인환은 1950년대를 극명하게 살다간 시인이다. 비록 31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온 몸으로 불태운 그의 시혼은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숨쉰다. '세월이 가면' 의 박인환은 바로 우리 인제민의 영원한 반려자이기에 군민의 정성을 모아 여기에 시비를 세우고 기린다 (강원도 인제군 합강정공원 소재)



박인환(朴寅煥, 1926 ~ 1956)

시인. 강원도 인제 출생. 경성 제일 고보를 거쳐 평양의전 중퇴. 1945년, 마리서사 (마莉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기림 . 오장환 . 김광균 등과 알게 되었고, 김경린 . 김수영 등과 어울렸다.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경향신문에 근무했다. 1949년, 김경린. 임호권. 박인환. 양명식 등 5인의 합동 시집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을 발간하여 모더니즘의 기수로 각광을 받았다. 박인환은 1930년대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을 계승한 1950년대의 후기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후기 모더니즘의 형식적 새로움은 새로운 현실인식과 사회적 실천에서 불가피하게 태어난 것이 아닌, 현대 서구 문학의 학습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 관념이 사회적 기반을 결(缺)하고 있다는 점에서 1930년대 모더니즘의 발전적 계승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으며, 그것은 1940년대 말기의 명동 중심의 지적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박인환은 <후반기> 동인이었으며, 대표작으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 얼굴 >등이 있다. 글쓴이 : 장석주 작가 1998.11.24. 세계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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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전례음악
글쓴이 : Dr J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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