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 및 영향 1907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운동을 말한다. 입체파(立體:Cube)란 명칭이 붙은 동기는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을 보고 마티스는 '조그만 입체(cube)의 덩어리'라고 했고 비평가 복셀은 "풍경도 건물도 집도 모든 것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즉 입방체로 환원했다.", "기묘한 입방체의 유희"라고 한 것에 있다. 이 비평들은 브라크의 새로운 작품을 야유하기 위한 의미로 쓰여졌으나 피카소와 브라크의 새로운 회화 이념으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시인 아폴로 네트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붙인 명칭이다. 후기인상파 세잔이 말한 "모든 자연은 원통, 원추, 원구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말에 감동을 받아 입체로 표현하기 시작하여 브라크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무렵 피카소는 대담한 볼륨의 기하학적인 변형을 통해서 3차원의 형태를 표현하고자 했다. 입체파의 주장은 "어느 한 물체의 양상은 정해진 장소에 따라 규정되고 또 변화하지만 그 본질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소와 때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보다도 그대로 있는 것을 잡고 그것을 정해진 장소가 아닌 무한의 공간에 두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화하지 않는 본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려 하였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主情的)인 표현을 폐기한 대신 시점(視點)을 복수화하여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며,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그림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순수회화의 본질인 색채와 평면성을 강조하는 추상미술을 시도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브제 미술이 시작되어 다른 현대미술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잔풍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잇다.
(가) 초기(세잔적) 입체파 (1907 ~ 1909) - 제1기 세잔니즘 시대로 기하학적인 형으로 단순화시켰으며 브라크는 세잔에 기초하여 큐비즘을 발전시켰다. 피카소의 경우는 주관적이고 고백적인 그림에서 모든 대상을 입체적인 형태로 환원시켜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하였다. 1907년 이미 피카소는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강한 데생풍의 명암(明暗)을 없앤 수법으로, 아프리카 흑인 조각에 가까운 인물표현을 시도하였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입체파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며 분석적 큐비즘의 단초(복수시점과 촉각적 평면의 구성)가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브라크 역시 이 당시 세잔과 피카소의 그림에 힘입어 초기의 야수파 미학에서 벗어나 대상의 구조와 질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며 1908~9년경에는 이런한 초기의 세잔의 재해석이 일련의 풍경화로 나타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려진 풍경화는 집과 나무들이 단순한 입방체로 환원되어 있고, 색채는 제한되어 있으며 조명이 여러 각도에서 비춰진 것처럼 그려져 있어서 큐비즘 회화의 한 특징인 복수시점을 느끼게 해 준다. 이러한 풍경화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은 대상에서 찾아낸 선, 질감, 부피 같은 조형요소들 자체에서 또는 그것들의 배열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나) 분석적 입체파 (1910 ~1912) - 제2기 이 시기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여러 시점에서의 대상을 평면 위에 표현하는 과학적인 큐비즘이 나타난다. 수직, 수평, 대각선, 원통 등의 기본 방향을 강조하며 입체 기하학적인 기본 형태의 리듬으로 표현하였다. 자연의 해체와 재조직을 통하여 현실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탈피함으로서 인간의 순수한 지성에 의해 해채된 각면을 자유로이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미의 발견에 정진하던 시기였다. 주제도 집이나 수목에서 한 걸음 나아가 과실·술병·컵 등의 정물적 모티프가 되고, 다시 기타·만돌린·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등장하여 분해된 그들 형체가 전후좌우로 서로 뒤섞여지므로 마치 거울면의 난반사(亂反射)를 방불케 하는‘시각적인 확대’를 획득하는 것이 되었다. 분석적 입체파의 가장 큰 업적은 르네상스이래 이루어져 온 일들의 동시적 존재를 뒤집어서 형체의 동시존재로서 정착시킨데 있으며, 인간의 얼굴만 하더라도 측면, 정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시점(視點)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이집트의 벽화나 부조에서 볼 수 있는 인물표현의 다원적(多元的)인 전개이며, 같은 입체파의 유력한 멤버였던 F.레제가 프리미티브한 예술에 기울인 관심과도 관계가 있다.
(다) 종합적 입체파 (1912 ~ 1914) - 제3기 1기 세잔풍의 초기 입체파와 2기 과학적 분석적 입체파를 종합하면서 사실적 요소의 부활 표현이 나타난 시기이다.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분석적 입체파가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를 망각한 위기에서 비롯된 기법으로, 화면에 사실적인 요소가 다시 도입되면서 초기의 냉담한 색조가 밝아지고 따뜻하게 되며 빠삐에 꼴레, 꼴라쥬 등의 새로운 기법을 낳은 시기이다. 즉 즉물적(卽物的)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 등을 화면에 붙여가는 방법이며, 최초의 빠삐에 꼴레는 1912년 브라크에 의하여 응용되었다. 물론 입체파의 빠삐에 꼴레는 회화적인 의미에서의 테크닉이었으므로 그것으로 바로 화면에 현실감을 주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러한 화면에 있어서 이질적인 촉감이 처음에는 시각을 통하여, 다음에는 보는 사람의 심리에 어떤 종류의 거스름으로서 작용한 것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이것은 피카소가 말한‘입체파의 눈과 마음이 지각한 것을 표현하는 수단’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2. 주요작품 및 해석
세잔과 같이 피카소도 미술의 본질이 형태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세잔의 조형사고를한 단계 더 깊이 밀고 나갔다. 피카소에게 형태란 앞면, 뒷면, 윗면 등으로 구성된 입체덩어리였기 때문에 모든 형태를 면으로 분석하여 결합시켰다. <그림-2> 아비뇽의 처녀들은 제 1기 초기 입체파 시대의 작품으로 몇 달간 수백 장의 데생과 습작 끝에 그의 나이 26세 늦여름에 내놓게 된 것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작품이었고 주변 친구들의 큰 기대감 속에서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 그림의 반응은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게 그림인가?" 할 정도였다. 그들은 분노와 경악으로 말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마티스 마저 격분했고 브라크도 이건 "우리에게 석유를 마시게 하고 밧줄을 밥으로 먹으라는 것과 같다" 라고 혹평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그림이야말로 지금까지의 모든 지구상의 모든 회화 세계를 붕괴시킨 미술사의 대혁명이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등장한 우아하고 풍요로운 요정이나 비너스가 아니라 거리에서 몸 파는 천한 여인이 주인공이 되어서 문명화된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는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주는 충격들은 바로 자연이 가지고 있는 3차원의 세계 즉 평면적 관점이 아닌 입체적 관점인 '원형, 원추, 원구'로 처리해 내는 데 있다. 그는 세잔의 회화적 비전을 현실화했으며, 지극히 복잡한 다원적 공간을 아주 단순하고 축소된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창출해 내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나의 아름다운 여인 Majolie] 와 [풋나기 투우사]의 작품은 제 2기 분석적 큐비즘이 자리잡는 시기다. 기존의 회화를 해체하고 재조합을 연속적으로 이어가면서 신비한 효과를 내었다. 악기의 모양은 그림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피카소와 연인이 함께 즐겨 부르는 노래와 음악 소리가 들려 오는 것같이 연상시켜 주었다. 분석적 큐비즘이 그런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음악적 요소를 통해서 피카소와 그의 애인은 하나로 결합되고 연주되고 있다. 온화한 색깔 속에 뛰는 맥박 소리, 시원한 색감의 교차, 옅게 가물거리는 듯한 화필 터치는 피카소가 에바의 숨결까지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카소는 그녀의 뛰는 숨결과 박자까지도 그림으로 가시화한 것이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은 매우 과학적이었다. 사방에서 본 형태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거기에 시간까지도 하나로 결합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러한 그림들을 보고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작품의 제목을 보고 유추할 뿐이지 사람들은 그것들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더 큰 고민은 눈, 코, 입 등 입체파가 그린 형태들은 모두 조각 조각으로 분해가 되어 그 형태들에다 삶의 정서를 반영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림은 전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입체파의 고민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알아보지도 못할뿐더러 기쁨이나 슬픔, 분노 등 생활에서 느끼는 삶의 정서를 표현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그림-5>의 [쉬즈병」작품에 사용된 빠삐에 꼴레라는 기법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린 형태를 알아보지 못하자 그들은 「쉬즈병」에서 보듯 병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병의 상표를 그림에 붙인 것이다. 그러나 효과는 신통치가 않았다. 입체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낸다. 피카소는 생각했다. 분석적 방법을 유지하면서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만들어 낸 작품이 <그림-6>의 [통곡하는 여인]과 같은 작품이다. 이 그림은 형태가 깨지게 되면 감성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물체 본연의 형태를 유지했다. 여자의 얼굴을 유지하면서 그 속에 양 측면에서 본 얼굴과 정면에서 본 얼굴을 하나로 결합하였다. 마침내 얼굴의 형태가 유지됨으로써, 피카소는 기쁨이나 슬픔, 분노 등을 표현해 낼 수가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제 3기 종합적 입체파라로 부른다.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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