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ois Gymnopédie (I ~ III)
Erik Alfred Leslie Satie(1866 ~ 1925)
에릭 사티 - 세개의 짐노페디
Lajos Lencsés, Oboe Giselle Herbert, Harp

Gymnopédie I. (03:02)
느리고 비통하게 Lent et douloureux
Gymnopédie II. (02:21)
Gymnopedie Style
〈짐노페디 Gymnopedie〉라는 말은 고대 그리이스에서 나체의 남자가 춤추던 의식 무도를 가리키는 'Gymnopaedic'에서 사티가 만든 말이다.
그리이스의 옛 dance에 유래하였는데 연주할때 첫째 박자에는 bass음을 둘째박자에는 sustained chord를 사용하여 melody를 치는 style을 말한다.
Musique de Nuit - Erik Satie


사티는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신조나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간 '세기말의 반항아'였다. 그는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들을 써냈다. 괴팍한 아이디어와 신랄한 유머, 그리고 신비주의와 순수에 대한 이념이 그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만들어냈다. 파리음악원을 마친 후 1884년부터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곡계에 뛰어든 그는 <오지브>(1886) <사라방드>(1887) <짐노페디>(1888) 등을 통해 단선 성가풍의 투명한 음악들을 선보였다.
1890년에 몽마르트로 이사간 그는 기괴한 옷을 입고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 시기부터 드뷔시와 친교를 가졌으며, 또한 신비주의적 비밀결사인 <장미십자교단>의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장미십자교단의 종소리>와 같은 작품을 써냈다. 그는 <지휘자 예수의 예술 메트로폴리탄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일한 교인이 된 적도 있다. 1898년 파리를 떠나 아르쾨유로 간 그는 조그만 방에 기거하면서 죽는 날까지 살았다.
항상 아마추어로 취급받는데 대해 불만을 느낀 사티는 1905년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알베르트 루셀에게 다시 음악을 배웠으나 그의 음악은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1917년에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는 반전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수법과 혁신적인 사티의 사상은 미래파의 출현을 예고해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1866년 프랑스 옹플뢰르에서 해운업을 하는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밑에서 태어난 에릭사티는 니데르메이에르의 제자 비노(Vinot)에게 피아노 레슨을 시작으로 음악수업을 시작하였다. 1879년 프랑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라비냐크에게 피아노, 화성, 솔페주를 배움웠으며 동시에 시인 콘타민 드 라 투르(Contamine de la Tour)와 친교를 맺었다.
1884년에 파리음악원을 마친 후 부터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곡을 시작한 사티는 1886년 "오지브(Ogives)"를 통해 그의 중세에 대한, 그것도 조잡하게 양식화된 신비로운 중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1887년의 3개의 "사라방드(Trois Sarabandes)"와 1888년의 "짐노페디(Trois Gymnopédies)" 등을 통해 그의 혁신적인 음악세계를 보여주었다.
1889년에는 만국박람회에서 접하게 되는 아시아와 중앙유럽의 음악은 그노시엔느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듬해 1890년부터 1891년사이 작곡하여 발표된 6개의 "그노시엔느(Si Gnossiennes"는 짐노페디와 함께 그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 되었다.
1890년에는 몽마르트로 거처를 옮겼으며 거기서 "검은고양이"라는 카바레와 "클루"라는 술집에서 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 때부터 드뷔시와 친교를 가졌으며, 특히 드뷔시는 그의 작품 그노시엔느 제1번과 제2번을 관현악으로 편곡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사티는 신비주의적 비밀결사인 "장미십자교단"의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1891년과 1892년에는 "장미십자교단의 3개의 종소리(Trois Sonneries de la Rose Croi)"을 남겼으며 1893년 "고딕식 무곡(Danses gothiques)"과 1894년 "천국의 영웅적인 문의 전주곡(Prelude de la porte heroique du ciel)"등을 작곡하였다. 1895년에 그는 "지휘자 예수의 예술 메트로폴리탄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일한 교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오르간을 위한 곡으로 "가난한 자의 미사(Messe des pauvres)"를 작곡하여 그의 미니멀적인 미학선율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1898년 파리를 떠나 아르쾨유로 간 사티는 조그만 방에 은둔한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항상 아마추어로 취급받는데 대해 불만을 느낀 사티는 재능과 표현력이 넘치는 매우 많은 피아노곡집에 조롱이 가득찬 제목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1897년 "싸늘한 소품집(Pieces froides)", 1903년 "배(pear)형태인 3개의 소품(Trois Morceau en forme de poire)", 1906~1910년 "새로운 싸늘한 작품(Nouvelles Pieces froides)", 1908~1912년 불쾌한 개요(Apreçus desagreables)", 1912년 "야무진 데가 없는 전주곡(Preludes flasques)"과 "정말로 야무진 데가 없는 개를 위한 전주곡(Veritables preludes flasques pour un chien)" 그리고 1915년 "두 번째의 사상(AvantDernieres Pensees)"등에서 의도적인 그의 조롱과 익살을 작품속에 넣었다
1905년, 39세의 사티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는데, 알베르트 루셀에게 다시 대위법 수업을 들으며 음악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1911년 "승마복을 입고(En habit de che-val)"등을 발표하였으나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그의 음악이 치부되면서 사티의 반항정신이 더욱 굳어지는 결과를 나았다.
1917년에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가 반전되면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를 계기로 사티는 자신의 야심찬 작품인 실내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적 극작품인 "소크라테스(Socrate)"를 작곡하였으며 1920년에는 막스 자콥(Ma Jacob)의 희곡 "인테르메쪼"에 사용된 "가구의 음악"에 다리우스 미요와 공동 제작하여 그의 전위적 실험 정신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25년 7월 1일 성 조셉 병원에서 에릭 사티는 악화일로에 있던 간경화증으로 지켜보는 사람없이 쓸쓸이 사망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