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욕설과 도리깨춤/ 류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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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욕설과 도리깨춤

류 영 국


욕설이란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저주하는 뜻을 품고 있는 악담으로 가히 추켜세울 것은 못 된다. 어떤 것은 몸서리쳐지는 의미가 담겨 있는가 하면 더러는 혐오감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도 그러한 말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진액의 정이 넘칠 때가 있으니 논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불가사의다.

 

욕을 해도 전라도 사람들만큼 푸지게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상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반은 욕이다. 물론 전라도 사람들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전라도 욕설 중에서도 그 중 진하고 찰진 욕은 지금부터 사오십 년 전까지 시골 부녀자들이 먹이고 받던 것들이다.

 

닷새 만에 서는 시골장터에서 친정동네 처녀와 시집간 아낙이 만났다고 치자. 두 여인은 솔개를 본 암탉처럼 한동안 멀뚱한 눈으로 서로가 바라만 보고 섰다. 그러다가 달려가서 둘이 손을 잡는다. "오사허네. 아니, 이 작것(잡것)이 어쩐 일이다냐."이거나 "아이고, 옘병(染病) 지랄허고 자빠졌네. 이 화상이 여태 안 뒈지고 살어 있네."하고 먹이면 받는 쪽에서는 "호랭이(호랑이) 물어가네. 이 작것이 어쩌자고 장바닥까지 까질러 나왔다냐."이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흔들어도 반가운 마음을 다 풀 수 없어 서로가 등을 쓸고 두들기다가 풀어져서 얼굴을 마주보고 그러다가 또 엉겼다. 오사(誤死), 잡(雜)것, 염병, 지랄병...입에 붙이기도 끔찍한 말들이다. 그러나 넘치는 정을 쏟아내는데 의미 따지고 면치레할 겨를 있는가, 그저 좋을 뿐인데. 둘 사이는 소꿉장난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그러다가 하나가 먼저 시집가서 고추당초보다 더 맵다는 시집살이 애옥살이를 견디고 있고, 또 하나도 머지않아 그런 시집을 가야 했다. 그래서 둘이는 속에서 울컥 치닫는 반가움과 느꺼움의 덩어리를 욕으로 쏟아낸 것이다.

 

"가서 눈 질끈 감고 살어. 잠깐이어."

친정어머니는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쫓겨 온 딸의 등을 떠밀어 보낸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딸은 몇 걸음 가다 돌아서서 빤히 바라본다.

"아, 싸게 까질러 가. 호랭이 물어갈 년, 칼이나 물고 칵 고꾸라져 뒈지면 좋으련만..."

친정어머니는 손사래를 치고는 치맛자락으로 콧물을 쥐어짠다. 길바닥의 질경이처럼 시난고난 사느니 차라리 일찌감치 죽으라는 기원은 딸을 아끼는 어머니의 정이 아니면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을 것이다.

 

소를 팔고 돌아서는 농부도 딸을 억지로 떠밀어 보내는 친정어머니나 다름없다.

"불쌍헌 것, 오늘 저녁에라도 도치(도끼) 날에 칵 고꾸라졌으면 좋으련만..."

소를 넘겨준 농부가 가래침을 긁어 뱉고는 북풍받이 재를 넘으면 팔려가는 소는 울컥 치미는 슬픔을 삭일 수가 없어 산모롱이를 돌아가며 '음매애'하고 길게 먹피를 쏟아낸다. 둘 다 어깨뼈가 부서지게 일하다가 대학생 하나 뒷바라지하자고 갈라서야 했으니 농부의 귀에 들리는 소 울음소리는 뼈가 저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라도 도치(도끼) 날에 칵 고꾸라지라'고 저주 아닌 저주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전라도 사람들 입에는 왜 이런 욕설이 머리카락에 서캐 실리듯 주절주절 붙어 있었을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학대 받고 괄시 당하는 설움이 독버섯으로 피어났을 것이다. 논밭뙈기가 많으니 쥐어짜면 본전 뽑겠다 싶어 돈으로 벼슬 산 탐관오리들이 부임하자마자 뜯어가는 조세라니. 선가미(船架米), 이가미(二價米), 부석가(負石價), 공석가(空石價), 차사원지공(差使員支供), 민고미(民庫米), 간색미(看色米), 낙정미(落庭米), 타석미(打石米), 인정미(人情味), 작지미(作紙米)...이런 것은 그래도 언턱거리나 있다.

 

조세에 이름을 붙이다 못해 나중에는 정역(丁役)도 안 가고 저승문턱에 들어섰다고 해서 죽은 사람 대신 군포(軍布)를 바치라는 백골징포(白骨徵布)가 있는가 하면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고 해서 어린아이에게도 정역 대신 조세를 물게 했으니 이게 다 전라도 사람들이 부담하던 조세들이었다.

이렇게 뜯기며 사는 사람은 그래도 호강이었다. 송곳 꽂을 땅뙈기 하나도 없는 사람들은 평생을 남의집살이하면서 부엌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대궁밥이나 눈물에 말아서 밀어넣고 살다 갔다.

 

생각해 보라. 그 넓은 호남평야 금만평야에 몸 붙이고 진흙 뒤지면서 풀뿌리 청맥죽(靑麥粥)으로 연명하고 그것도 못 대서 굶어죽는 그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남는 것이 악뿐이라 입에서 튀어나온다는 게 욕이요, 욕을 달고 살다 보니 개똥쇠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가 하면 소작료 다 대고 먹을 것이 없어 본자의 배로 갚는 곱장리 빚 얻어 먹고 야반도주하던 버릇이 남았다고 해서 하와이니 더블백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이런 이름을 부르기 전에 제위께서는 목민관인지 살민관(殺民官)인지 하는 그자들의 행패를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서 한번쯤은 찾아 볼 일이다. 남원을 배경으로 한 춘향전은 우리에게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오죽하면 암행어사가 출도해서 탐관오리 변학도를 징벌하는 허구를 꾸며냈으며 동학혁명은 왜 전라도에서 일어났겠는가.

 

졸견이지만 전라도 사람들의 설움은 멀리 삼국 통일 과정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야 할 것 같다. 동학혁명 때도 그랬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도 외세를 끌어들였다.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백제는 부흥운동마저 실패하고 나서 그 유민들이 호남평야를 찾아 내려갔다. 손에 쥔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라 구걸을 해야 했고, 구걸을 하자면 하다못해 땅재주라도 보여줘야 찬밥 덩어리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광대가 나오고 무당, 소리꾼이 나왔다. 운 좋으면 남의집살이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팔자가 더 풀리면 뼈 빠지게 남의 농사지어 주고 여물이나 얻어먹는 소작인이 되었다. 이러한 세습적 가난과 천대와 학대는 조선시대를 거쳐서 일제 지나 해방 뒤 농지개혁법이 공포될 때까지 계속되었고, 이렇게 살다 보니 사람들이 저절로 반골이 된 것이다.

 

고려 태조 세가(世家)에 실려 있는 훈요십조(訓要十條)중 제 8조에 "車峴以南 公主江外 山形地勢 幷趨背逆 人心亦然(차현이남 공주강외 산형지세 병추배역 인심역연=차현 이남 공주강 밖은 산세와 지세가 모두 도읍을 등지고 거꾸로 달려서 인심 또한 그렇다.)"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풍수설은 조선시대에도 적용되어 이성계는 전주천 냇물을 막게 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생긴 못이 덕진 연못이라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의 하천은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흐르는데 유독 전주천만은 역천지수(逆天之水)라 남에서 북으로 흘러서 역적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의 반골 사상은 산세 탓이 아니고 역사 탓인데 그걸 어찌 풍수로 땜질하려고 했던가.

 

순이과즉역(順而過則逆)이다. 순리라도 그 도가 넘치면 역리가 되느니, 슬픔이 극에 달하면 웃음이 나오고 기쁨이 극에 달하면 눈물이 나오는 법이라. 억압과 설움이 몸에 배어 살다보니 괴어 있는 그 한의 덩어리는 곱게 삭아서 낙천과 풍자와 해학의 과즙이 되어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는 창법이 나왔고, 여기에 신명이 더해서 도리깨춤이 나온 것이다.

 

오뉴월 땡볕에서 밭을 매다가도 논일하는 남정네들이 쌀뜨물 같은 농주 몇 잔 걸치고 농악을 울리면 아낙들은 업은 아이가 흘러내리건 말건 너울너울 도리깨춤을 춘다. 조금 전까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콧물을 훌쩍거리던 여인은 어디 가고 밭고랑에는 둥실둥실 구름 위로 떠오르는 선녀만 남는다. 가락이 따로 없다. 내가 신명이 나서 흔들고 휘젓는데 고수(鼓手)의 북장단이 무엇 말라비틀어진 쭉정이란 말인가. 진양조 가락으로 길게 늘여 빼다가 돌개바람처럼 잦은머리 휘몰이로 몰아붙이고 그러다가 잠자는 듯 사그라지는가 싶으면 추녀 끝으로 쏟아질 듯이 흘러내리는 지붕 물매가 다시 하늘로 치솟듯이 어느새 둥실둥실 떠올라서 호밋자루를 쥔 팔이 허공을 휘젓는다.

 

정이 정을 만들고 흥이 흥을 돋우는지라 남녀가 따로 없고 반상이 따로 없다. 낮술도 거나하게 올라오것다, 긴 담뱃대 문 노인네가 백모시 적삼 소매를 들어 너울너울 흔들어대면 나무 그늘에서 낮잠 자던 동네 개도 덩달아서 꼬리를 치며 짖어대고, 논바닥에는 벼 포기가 밭고랑에는 콩 포기가 몸을 꼬고 너울너울 춤을 추어 들판이 온통 춤사위 판이었다.

 

차라리 괄시받고 서러울망정 전라도 풍류객들은 이러한 신명을 숨길 수 없어 제 몸을 쥐어짜서 춤을 추고 소리를 해야 했고, 정을 주체할 수 없어 저주하는 욕을 퍼주는 역설이 이들의 순박한 생활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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