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가에 의한 7개의 변주곡(C장조 WoO.78)
베토벤과 영국 음악과의 관계는 결코 얕지 않다. 특히 스코틀랜드민요의 편곡은 잘 알려져 있는데 WoO.78 (WoO, Werke ohne Opuszahl : 작품 번호 없는 작품들) <영국 국가에 의한 7개의 변주곡>은 아마도 존 블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갓 세이브 더 킹> 을 주제로 작곡된 것이며 연주도 비교적 용이한 작은 변주곡이면서도 잘 다루어진 작품이다 작곡연대는 1803년(또는 초기 작품으로 보기도 함), 연주 시간은 약 10분가량이다. (연주자의 따라 다소 차이 있음)
주제는 2부 구조, c장조, 3.4박자오 기존의 주제 선율과 베이스를 바탕으로 하여 화성을 거기에 메워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c~G 까지의 5성에 의한 선율에 있어서 종말 직전에 놓인 최고음 A 가 효과적이다. 제 1변주는 폴리포닉으로 처리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대위적 변주는 당시의 변주곡 양식으로 보면 이색적인 존재였다 오히려 이것은 옛 양식의 가곡 편곡'의 수법에 이어지는 것이며 베토벤의 음악에 있어서 이 예 양식과의 관련성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제 5변주는 c단조, 이에 이어지는 제6변주(C장조)가 "마아치풍으로(Alla Marcia)"라고 지시되어 있는데 유의해야 한다 c단조-C장조에서의 기분 전환은 베토벤적 이념(자기 초월)을 표명하는 것이다. 제 7번주는 확대되어 있는데, 코다에 들어가 주제가 아다지오, d단조로 노래 불린다. 이것은 베토벤의 작품의 변종 기법의 한 특징을 이루는 것이며 낡은 양식의 변주곡과의 관련을 시사하는 것이다. [글; 세광최신명곡해설전집 인용]
영국의 국가(國歌) - 신이여 왕을 도우소서(God save the Queen(King))
'신이여 왕을 도우소서'는 영국의 국가로써 작곡자가 불분명한채로 1740년 영국에서 출판된 '싸루스 뮤직스'라는 음악책에 실린것이 처음이었다. 이것을 영국의 시인이며 작곡가였던 헨리 케어리(Henry Carey)가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고, 1745년 영국왕립극장에서 연주된 이후 국가로서 널리 불리었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랍니다. 19세기에는 약 20개국이 국가로서 이 선율을 인용하였으며, 미국에서도 1831년 이래 《아메리카》라는 가사로 준국가로서 불리었고 베토벤, 베버, 브람스 등의 작품 가운데도 이 선율이 쓰였다고 합니다. 영국의 국가와 비교해 보실수 있도록 아래에 영국의 국가를 첨부하였습니다.
말이 나온김에 영국의 국가에 대해서 몇가지를 더 소개해 드립니다. 1745년 챨스 에드워드가 왕위를 요구하고 나서자 근왕당원들이 '신이여 왕을 도우소서'를 부르며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삽시간에 널리퍼지게 되었다. 이노래의 제목중 '왕'이란 단어는 여왕이 즉위했을경우 '여왕'으로 바뀐다. 지금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재위하고 있으니까 '신이여 여왕을 도우소서'가 된다.
영국의 정식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영국국가의 멜로디처럼 많은나라에서 즐겨 불려지는 노래도 없을성 싶다. 물론 영국 연방국가들은 이국가뒤에 자기네의 국가를 계속해서 연주한다.미국에서는 이곡을 애국적인 찬송가로 불러지고있고 스위스, 덴마크, 독일 등에서는 의식의 노래나 애국적인 가사를 붙여 노래하고있다.
누구나 부르기쉬운 이곡의 근원에 대해서는 억측이 구구한데 독일에서 발생된 노래란 설이 유력하다. 영국에서는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연주자나 청중이 모두 일어서는것이 전통적인 예의로 되어있다. 하이든이 독일국가를 작곡하게된 동기도 그가 1794년 영국을 방문했을때 극장에서 모두 일어서서 국가를 듣던 광경에 감동되었기 때문이었다. 몇해전 까지만해도 우리나라에서도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전에 애국가가 연주되고 관객들이 모두 일어서 경의를 표했던적이 있다. 일찍부터 국가에대한 존엄성을 지켜온 영국인들의 전통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브렌델 [Brendel, Alfred, 1931.1.5~]
비젠베르크 출생. 자그레브와 그라츠음악원을 거쳐 스위스에서 E.피셔에게 사사하고 17세 때 데뷔, 좋은 평을 받았다. 1949년 부조니상을 받은 후 일약 유명해졌으며 빈을 중심으로 유럽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뛰어난 기교와 아름다운 음색의 소유자이며 피셔에게 물려받은 격조 높은 표현으로 정평이 나 있다. 레퍼토리도 매우 다양하며 슈베르트, 리스트, 쇤베르크, 베베른 등의 작품연주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지성파 연주자로 런던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Vox와 Philips의 두 레이블에서만 레코딩을 한. 자기 고집이 강한 연주자다.1949년 부조니 콩쿨에서 4위 입상으로 Vox 레이블과 완성도 높은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했으나, 당시의 명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과 호르비츠로 인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실내악의 피아노 파트를 담당하는 세션으로 참가하는 등.. 음악 연주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가진 연주자 이기도 하다.
요즈음은 비디오의 발전때문에 클래식 연주회에서도 연주 실력보다는 외모나 연주 당시의 행태(?)를 주로 부각시키는 연주자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이 오랜 세월을 두고 감상되어지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랜 시간동안 작품을 연구하고 연습하는 자기 색깔이 확실한 브렌델 같은 연주자가 더 손이 가는것은 어쩔수가 없을듯 하다.
브렌델은 외모(?)와는 다르게 뛰어난 테크니션이지만, 작품을 연주할때 그 테크닉을 우선하지 않는다. 즉, 그는 하나의 작품을 레코딩 또는 연주 공연을 하기 위하여 분석하는 시간을 많이 갖기로 유명하며, 그런 이유로 그의 연주를 들을때면 어딘가 모르는 불안감이라든지 막힘을 찾을 수가 없다. 베이스를 충분히 다져 피아니즘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당대의 최고 비루투오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브렌델이야말로 20세기의 피아니스트들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존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유난히 개성이 강하고,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워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서 그렇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자리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공기와 같이 원래부터 ‘그저 그냥 있는’ 존재같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른 연주가들의 떠들썩함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의 연주도 그렇다. 다른 연주가들처럼 자신의 개성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무색 무미 무취의 연주라 할 수 있다. 다른 요소들을 다 배제하고 ‘남은 것은 그저 음악’인 셈이다. 무엇이 그의 연주를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그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를 읽어내는 탁월한 혜안을 가졌다. 따라서 다른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지 않고도 그저 구도를 잡아나가는 것에 의해서만 작품의 의미를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해 내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은 다른 그 누구의 연주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노력 없이 직관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 ‘신적인 천재’라는 얘기는 아니다. 브렌델 자신이 고백하길 자신은 절대로 신동이 아니었다 한다. 과거 체코 땅이었던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17세 되던 1948년 첫 연주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리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에트빈 피셔라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스승으로 둔 것만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독일-오스트리아계의 정통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을 전부 그에게서 물려받았다.
1949년 부조니 콩쿠르에 입상한 경력은 그가 기교적인 측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증명할 뿐이다. 빈에 거주하다 런던으로 옮겨 소리 소문 없이, 하지만 알차고 꾸준히 활동을 전개해온 브렌델. 그는 계속해서 연구하며 저술활동도 펼치는 학구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의 성실성만은 연주에 아주 쉽게 반영되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한 레코딩을 펼쳐왔다. 이미 그가 필립스에 남긴 녹음들은 상당수가 된다. 베토벤의 소나타와 슈베르트의 소나타가 역시 대표적인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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