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음악 - 이문근 교회음악 (15)
스페인의 교회음악
여기서는 로마 악파(樂派)의 음악인들과 서로 협조하면서 교회음악에 지대한 공적을 이룩한 서반아 음악인들에 대하여 알아 보고자 한다. 서반아 음악인들은 교회음악에 있어서 뿐 아니라 속음악(俗音樂)에 있어서도 타국인들이 도무지 접근하지 못하는 독특한 경지를 알고 있었고 또 현대까지도 그대로 고집하여 내려옴으로써 서반아의 국민음악과 같이 되어있다. 서반아 음악이라면 그것이 교회음악이거나 속음악이거나 고대 민속음악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재언(再言)할 필요도 없으나 저속 (低俗)에 빠지지 않은 것도 또한 그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교회음악에 그들의 고대 민속음악의 색채가 보이더라도 조금도[기도하는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소위 진정한 속음악에 속하더라도 우아함과 고상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서반아 음악의 민속적인 그것은 거의 귀족적이며 거룩하게 민속적이다. 11세기 초에는 이미 그레고리안 성가가 전국에 퍼져 노래되고 있었으나 차차로 이나라의 민속음악이 교회음악에도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회적 또는 군사적인 어떤 사건이나 어떤 위대한 인물의 출현이 있으면 그것을 계기로 당시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이던 교회와 그 음악에까지 즉시 영향이 끼쳐졌었다. 13세기에는 Salamanca와 Barcelona의 각 대학에서 다성음악의 교육을 실시하여 타국의 Ars nova의 지식을 습득케 하였다. 서반아 다성음악의 개척자라고도 할 수 있는 이는 Majorca 섬의 철학자로 알려진 Raimondo Lullo 이다. 그는 Ars generalis sive magna (Arbor scientiae )라는 저서를 남겨 공헌한 바가 적지 않다. 15세기 후반에는 Ramis de Parja, De La Encina, De Anchieta, Juan Flecha 등 작곡가들이 속출하였고, 특히 Francisco Penalosa는 1470년에 탄생, Ferdinando 5세( 1452 - 1516)왕궁에 악장으로 있다가 로마에 와서 교황청 성가대원으로 있었고 동시에 작곡가이기도 하였다. 그보다 조금 후에는 Juan의 조카인 Matteo Flecha (1520 - 1604 )가 나타나서 작곡도 하고 자기 작품과 타인의 작품을 모아서 Ensaladas라는 책도 후세에 남겼다. 16세기의 서반아에는 한편 기사도적 (騎士道的)인 Romanze 또는 Cantarcillos와 Villancicos 같은 속음악이 대성을 이루는 반면에 순전히 교회음악 선법(旋法)에 충실한 엄격한 성가도 큰 발전을 하게 되었다. Diego del Puerto, Luis Milan, Luis de Narbaez, Juan Bermundo같은 사람들은 음악이론가요, 음악 연주가요, 동시에 또한 작곡가들이었다. 그 외에도 주로 Vihuela ( 비올라 또는 리우또 종(種)의 악기를 위하여 작품들을 남긴 사람들이 허다하였으나 16세기의 서반아 작곡가들 중에 뛰어난 사람은 Antonio de Cabezon 이다. Cabezon은 Burgos에서 1510년에 탄생하여 1566년에 Madrid에서 죽었다. 탄생하면서부터 눈이 멀었으나 필립보 2세 왕궁에 Musico de Camera Y Capilla - 왕궁과 궁 부속(附屬)성당의 음악인으로 있었다. 거기서 그는 오르가니스트이며 쳄발리스트로 있었으며, 특히 이 두개의 악기를 위하여 작곡도 하고 전사 (轉寫)도 많이 하였다. 교회음악 역사가요, 찰스부르크의 대 주교였던 추기경 J. Katschthaler ( 1832 - 1014 )의 말에 의하면 16세기 서반아의 주교좌 성당에는 플라망인들이 악장으로 있었다고 하였다. 때문에 이들의 영향이 지대하였으리라는 것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래서 교회음악에 있어서는 로마 음악인들과 거의어깨를 겨룰만한 대가들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그 중의 몇을 연대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Cristobal Morales ( 1500 - 1553 ) Siviglia에서 약 1500년에 탄생하여 1553년 Marchena에서 사망하였을 것이다.1526 ~ 1530년 사이에 Avila성당에서 악장으로 있다가 바오로 3세 교황 때에 1535년경 로마에 와서 교황청 성가대원으로 있다가 45년에는 다시 귀국하여 Toledo성당의 악장으로 47년 봄까지 있었다. 그 후에는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1551년 11월에는 확실히 Malaga에 있다가 Toledo로 갔다. 작품으로는 4성 - 5성의 미사곡 2권, Motetus 집(集 )이 2권, 4. 5. 6.성의 Lamentationes, 4.5성의 Madrigale등이 있다. 그는 철저한 플라망 교육을 받았으나 북방의 그렇듯 엄격한 기법에 자국의 뜨거운 정열을 더하고, 로마인들이 플라망인들에 대하여 다성음악의 정화를 꾀하던 기운과 합하여 엄격한 대위법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상한 시(詩)가 그의 음악에 깃들이도록 하였다. 즉 그의 음악에는 사람의 내적 투쟁이 전개되고 천주를 찾기 위한 갈망이 있었다. 2) Francisco Guerrero ( 1528 - 1599 ) 1528년 Siviglia에서 탄생하여 1599년 Siviglia 출생지에서 사망하였다. 잠시 동안 Morales의 제자로 있다가 Malaga시와 Siviglia시 주교좌 성당에 악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미사곡 Motetus, Passio, Vesperae등 주로 교회음악이다. 3) Tomas Ludovico da Victoria 그의 탄생지는 Castiglia 지방의 Avila이나 탄생 연대는 불확실하다. 가장 믿을 만한 설( 說)에 의하면 대개 1548년부터 1550년 사이로 보인다. 음악에 대한 초등 교육을 고국에서 받고 1565년에는 로마에 와서 다음해에 Collegium Germanicun의 성가대원으로 들어갔다가 1571년 같은 성가대의 Muchacos - 즉 소년들의 선생으로 초임되었고, 1575년에는 같은 성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592년에는 필립 2세의 누이동생 마리아의 궁전 성당 부속 신부로 임명되었다가 1594년 이후에는 로마를 떠나 마드리드 시의 궁전 성당 성가대원의 악장으로 1602년까지 있었다. 그의 작품은 전세기 초에 Leipzig시의 Breitkopt의 출판사에서 Pedrell의 감수로 출판되었었는데, 그것은 제 1권 Motetus, 제 2권 미사곡집 ( 1 ), 제 3권 Magnificat와 Canticun Simeonis, 제 4권 미사곡집 ( 2 ), 제 5권 성주간의 성가, 제 6권 미사곡집 ( 3 ), 제 7권 응답송가, 성영(聖詠) 교창가 (交唱歌 )등, 제 8권 그의 전기( 傳記)와 부록, 이상과 같이 되어있다. 빅또리아는 그 음악이 순수한 교회양식으로 되어있고 또한 그의 양식의 완전한 점으로 보아서 서반아의 다른 어떤 작곡가도 따를 만한 자가 없다. 서반아의 음악이 색채적( 色彩的 )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했으나 그 중에서도 빅토리아 만큼 진한 색채를 보표상에 사용한 사람은 적어도 당시까지는 없었다. 내적 생활을 잘하는 신부로서 일생을 마쳤기 때문인지 로마의 빨레스뜨리나가 내용도 내용이지만 작품의 형식적 완전성을 찾았던데 비하여 그는 어디까지나 내성적이다. 빅또리아의 작품을 들을 때에는 감각적인 흥분이란 없으며 오직 가톨릭교회만이 깊이 지니는 신비경으로 끌려 들어간다. 이같이 빅또리아의 음악이 “ 신비스러운 것 ” 이라는 것은 “ 가톨릭 서반아 ”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당시에는 서반아에 가톨릭의 발전이 융성했었고, 더구나 신비신학자 대 데레사는 그와 동 시대 인이며 같은 Avila 출신이었다. 더구나 신비신학 시대에 성 십자가 요한도 동 시대 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신비스러운 음악이 나왔다는 것이 조금도 우연한 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중세기 음악의 권위자 Haberl 은 빅토리아의 음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이 작곡자 안에는 서반아 예술과 로마 예술의 모든 고귀한 성품이 다 있다. 그의 노래는 선율적(旋律的) 또는 화음적(和音的) 명확성을 조금도 손상치 않고 엄숙하고 고상한 신비에 아로새겨지며 진정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 그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자신도 1581년에 자기의 작곡 성영 (聖詠)과 성시(聖詩)를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께 봉헌하였을 때에 그 봉헌사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무엇보다도 종교음악과 교회음악에 나는 본능적으로 여러 해 동안 끌려왔고 그러므로 내 자신을 거기에 바치고 일하는데 행운도 없지 않습니다......... 악인들, 퇴폐적인 사람들은 땅위의 쾌락에 젖기 위한 흥분제로 음악을 사용하나 음악을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천상의 일을 묵상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여간 나로서는 하느님의 은혜로 노래는 처음에 그것이 생긴 목적을 위해서만 불리워 지도록 - Deo optimo clarissimo laudibusque suis - 노력할 뿐입니다.” 어떤 현대학자 한 사람은 빨레스뜨리나를 만일 베토벤에 비교한다면 빅또리아는 슈베르트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대체로 서반아 다성음악은 외면상으로 보아 플라망 내지 로마의 것이다. 즉 당시 다성악에 있어서는 플라망 - 로마의 다성악이 국제적인 음악언어로 ( Langage Musicale ) 되어 있었고 여기에서 서반아의 다성악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음악의 정신은 타국의 음악과는 달리 매우 독창적이었다. 빨레스뜨리나의 음악이 광휘(光輝)에 빛난다면 서반아의 다성악은 명암 (明暗)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전자가 사사로운 감정에 치중하지 않고 엄격한 아버지와 같이 사람의 마음에 임한다면 후자는 자모 (慈母 )의 성격으로서 사람의 마음과 같이 즐기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곡은 빅또리아의 것으로 성금요일 성무일과 (聖務日課)의 조과 (朝課 )의 제 5독서 후에 따르는 응송 (Responsorium )으로서 가사의 내용은 “ 유대아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즈음에 세상이 어두워지고 9시경에 ( 현대 시간으로는 오후 3시경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시기를 [내 천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을 바치셨도다.”라고 되어있다. 여기 소개된 것은 곡의 첫 부분이지만 곡의 첫 소절 (小節)부터 인상 깊게 오도하행 (5도下行)을 하여 다음 소절단삼화음(小節短3和音)에 이르러 무섭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Dum Crucifixissent에는 못 박히시는 광경에 슬픔을 못 이겨 부르짖는 교우들의 안타까워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Horamnonam에 긴 음부(音符)로 되어있는 것은 수난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시각, 즉 9시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얼마나 길고 지루하시었을 것인가를 느끼게 하며, Voce Magna 에 텅 빈 이중8도 (二重八度)음정의 화음 - 5도음도 없고 3도음도 없는 화음으로 되어 있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그 잠깐까지도 유대아인들은 예수를 구세주로 못 알아보았으니 그의 마지막 부르짖음도 허공을 향하여 흩어졌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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