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도의 젊은 청년들(김희준,박인악,문판길,김봉옥,정회진,최원리 등)을 중심으로 중등 과정인 재건 중학이 설립되었다. 1968년 3월 대기리 공회당에 재건 중학교가 문을 열었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재건 중학교가 모태가 되어 1968년 12월 임자 중학교가 신설되었고 후일 임자 종합고등학교가 설립된 것이다.김희준을 중심으로 한 3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은 일체의 댓가를 받지 않고 후진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중학교가 설립되었다. 김희준 보다 앞서 2차례에 걸친 중학과정 운영이 있었다.최초의 것은 최원리가 운영한 것으로서 휴전 직후 역시 대기리 공회당에 마련되었으나 약 2년 가까이 지속되다 중단되고 말았다.최원리는 6.25라는 격변기에 조부모,부모,형제를 모두 잃어버린 피해자 당사자이면서도 후진교육을 통해 분열된 지역사회를 다시 복원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그러나 그는 지역내 깊은 갈등과 분열의 골을 확인하면서 2년 만에 폐교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당시 최원리와 시작을 같이 했던 지도의 경우 중학교 설립에 성공했다.최원리의 실패로 말미암아 임자도는 지도에 비해 십여년이라는 인재 공백과 고갈이 초래되었다. 염전 산업이 대 호황기가 되어 소금값이 금값으로 변했다.면민들이 만들어 놓은 면염전의 소득도 비례해서 커져갔다.그러나 그 결과물은 면민 사회에 발전적으로 투입되지 못하였다.당시 지서장을 하던 이가 면 특별회계 회의 석상에서 기관장의 자격으로 참석했다.그는 한 가지를 건의했다.[염전에서 생긴 수입을 흥청망청 써버릴 것이 아니라 후대 교육을 위해 한가지라도 장만해 놓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당신들이 해야할 일이요 또 그것이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김희준을 중심으로 한 청년들은 중학교 설립을 착안하고 방법을 숙의했다.그들은 학생모집에 나서 120여명의 학생을 모으고 대기리 공회당에서 면민 200여명 참석리 재건중학교를 개교식을 개최하였다.교사는 김봉옥 문판길 정회진이 맡았다. 이어 김희준은 재건중학교의 공립화를 추진한다.당시는 박정희 정권초기로서 재정난으로 중등학교 신설을 제한하고 있던 실정이었다.무안군 도서 지역의 경우 중학교가 이미 설립된 지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데도 중학교가 없어 중학 진학희망자들은 모두 목포나 광주로 유학을 나가야 했다.그 결과 국민학교를 졸업한 극소수의 학생들만이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공립중학교 설립계획은 도 교육청 접수단계에서부터 벽에 부딛혔다.서류접수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추진위원들은 동분서주하였다.만일 조속한 시일내 설립인가를 받지 못하면 앞서 실패한 전철을 또다시 밟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먼저 학생이 흩어지고 다음은 힘들여 조성해놓은 학교 설립에 대한 면민들의 열의가 식어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그렇게 되면 중학교 설립의 세번째 싹도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김봉옥 문판길 정혜진은 학생지도에 매진하고 박인학은 학교 설립을 위한 도내 분위기 조성에 열성을 다했고 호남 매일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최원리는 과거의 실패를 경험으로 해 방해요소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이 때 김희준은 임자도출신으로서 도 교육위원이자 목포에 사업을 하고있던 김종림을 만나게 된다.그는 임자중학교 설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김종림은 이들과 뜻을 같이 하여 안용태 도교육감 설득에 나섰으며 결국 안영태는 [정년퇴임하는 나에게 마지막 기념으로 낙도인 임자에 중학교를 허가해달라]고 문교부에 탄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문교부에서 당시 여건상 불가능하였던 공립중학교 설립을 임자도의 경우에만 특별히 허가하기로 내정하였다.그러나 여기에 조건이 달렸다.정부의 예산이 없으므로 설립 이후 일 년간은 자체에서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김희준 등은 교사가 지어지기 전까지 기 사용하고 있던 재건중학교 건물(초가집)을 임시 사용하기로 하였다. 1968년 12월 16일 임자 중학교 설립 허가 통지서가 김희준 앞으로 우편 송달 되었다.무안군 도서지방에서는 지도 다음의 두번째 쾌거였다. 이듬해 임자 공립중학교에 교직원들이 발령되어왔다.그들은 그들앞에 놓여진 가마니 깔린 초가집 학교에 아연실색했다.한 명은 울기까지 했다. 학교건물 신축작업이 시작되었다.김오배가 20만원을 기부하는 등 지역 내에서 물심양면의 지원이 있었다.육군 31사단에서 자재와 인력을 협조하였다.임자중학교의 설립은 당시까지 자연부락,씨족,국민학교 등 기초적 공동체 밖에 없어 상호 배타적이고 분열적일 수 밖에 없었던 임자도의 여건에서 면민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낼 수 있는 구조적 틀의 탄생을 의미하였다.
임자 중학교 설립의 산파 김희준은 6.25를 전후해 비운속에 가버린 무수한 선배들을 그리며 [임자도 소야곡]을 작시한다.
大屯山 숲기슭에 설리살든 숫궁새는 명사십리 海堂花의 식어가는 純情을 울더니만 지양없이 가버리고 渡口浦 백사장 헤어진 砂丘마다 추모매진 헌 신짝 하나 旅窓을 뒤흔드는 깊은 가을 찬바람은 번지없는 주막집의 어떤 여인내의 예?㉯? 향수이랴 웃음은 가고 廢墟의 옛터전에 호롱불만 깜박이니
주인잃은 台耳島야 옛 영화는 그 시절 어데가고 老鹿島 등대불만 가신님을 기두리냐. 바위끝에 뉘었고 추겨매고 사공부르는 저 소리는 秋夜三更 깊은 밤에 悲哀만을 돋워준다.
찾아오는 사람없이 수평선에 달이떠 白沙場 발자욱이 괜히 슬프다. 아,정든 내고향 정든 옛님은 간 곳이 없고 사나이의 쌓은 탑이 흔들리구나. 屛風,台耳 석장 끝에 빈 나루배 매어서 어느 손 기두리냐. 외마디 타령 아,충성의 길이 효성의 길이 한길이언만 말 없는 임의 墓에 들국화 핀다. |